

코스피 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가운데 올해 국내 주요 기업들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이 2011년 이후 14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할 것으로 나타났다. 반도체와 조선, 방위산업, 원전 기업이 실적을 견인하면서 한국 증시가 한 단계 도약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가증권 시장에 상장한 시가총액 상위 30개 종목의 재무 지표를 분석한 결과, 이들의 올해 ROE 전망치는 평균 12.3%로 집계됐다. 경상수지 흑자가 절정에 달한 2015년(11.9%)을 훌쩍 넘어서는 수준이다. 다만 미국(19%), 영국(14%), 대만(15%) 등 선진국 주식 시장의 ROE에 비해선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

상장사 ROE 개선되며 증시 레벨업
시가총액 상위 30개 종목의 ROE는 2010년대 들어 맥을 추지 못했다. 2020년 코로나19 때는 3.7%로 최저를 찍었고, 좀처럼 5%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 빅테크와 중국 제조업체의 공세에 밀리고 인공지능(AI) 분야에서도 뒤처진 탓이다. 대표 기업들의 ROE가 회복세로 전환한 것은 지난해(9.7%)다. 반도체와 조선 업황이 기지개를 켜면서다.
올해는 조선·방위산업·원전 기업들이 시총 상위권에 대거 진입하며 국내 증시가 한 단계 ‘레벨업’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들은 연간 조 단위 영업이익을 벌어들이며 전체 ROE를 견인하고 있다. 시총 10위권에 새로 들어선 HD현대중공업(22.9%), 한화에어로스페이스(19%), HD한국조선해양(17.5%) 등은 올해 20% 안팎의 ROE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됐다. 현대로템(28.2%), 메리츠금융지주(21.4%), 한국전력(17.1%) 등의 실적 개선도 기대된다. 국내 증시의 ‘가성비(가격 대비 성과)’가 좋아졌다는 것이 증권가 평가다.
2015년 이후 유가증권 시장 시가총액 상위 기업을 전수 조사해보면 최근 10년 동안 시총 20위 기업 중 9개가 바뀐 것으로 나타났다. 화학, 철강, 정유 등 전통 제조업체가 밀려나고 조선·방산·원전 기업이 빈자리를 치고 들어왔다. 최근 5년 새 상위권에서 밀려난 기업은 LG화학(화학), 포스코홀딩스(철강), 엔씨소프트(게임), SK이노베이션(정유), LG전자(가전·디스플레이), LG생활건강(화장품) 등 6곳이다. 특히 정유·화학·철강 업종의 부진이 두드러졌다. SK이노베이션은 적자를 이어가고 있다. 유가 하락과 원료인 나프타 가격 변동으로 정제마진이 축소되면서다. LG화학과 포스코홀딩스의 수익성도 크게 악화했다. 2020년 ROE가 각각 2.8%, 3.2%였는데 지난해 1.2%, 1.98%로 뚝 떨어졌다.
시총 상위권에 새로 진입한 기업은 LG에너지솔루션(2차전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우주·방산), HD현대중공업(조선), 한화오션(방산·조선), 두산에너빌리티(원전), HD현대일렉트릭(전력기기) 등 6곳이다. 이 중 HD현대일렉트릭의 올해 ROE는 34.4%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공지능(AI) 붐 등을 타고 전력 수요가 급증한 덕이다. 김종민 삼성증권 수석연구위원은 “AI 반도체와 전력기기의 상승 추세는 꺾이지 않을 것”이라며 “글로벌 패러다임이 전환된 업종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성장 경로를 걸어갈 수 있다”고 내다봤다.
"K-증시, 명품 진열된 고급 백화점"
증권 업계에서는 ‘K-증시’가 질적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과거 한국 증시는 삼성전자 중심의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었지만 이제는 조선, 방산, 원전, 배터리 등 글로벌 전략 산업 리더들의 집합소가 됐다는 얘기다. 한국 증시의 투자 매력 역시 커졌다는 평가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중국이 밸류체인(가치사슬)에서 배제되고 있기 때문에 빅테크가 AI 투자를 하든, 미국 정부가 군함과 원전을 늘리든 한국 기업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글로벌 투자자에게도 한국 증시는 다양한 명품이 진열된 고급 백화점이 된 셈”이라고 설명했다.
‘조·방·원’ 외에 K-컬처 산업도 국내 증시를 탄탄하게 받쳐줄 기대주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비롯한 K-컬처 열풍에 엔터테인먼트주뿐 아니라 삼양식품 등 식품주, 파마리서치 등 미용기기주 등이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서다. 한 펀드매니저는 “K-컬처는 10년 이상 지속될 성장세의 초입으로 보인다”며 “한국 고유의 특수성을 반영해 새로운 스토리가 기대되는 산업들이 새 주도주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국내 증시가 중장기 랠리를 이어가려면 전통 제조업의 실적 개선 본격화, 정부의 정책적 노력, 미국 관세 등 글로벌 리스크 완화 등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김연수 칸서스자산운용 대표는 “국내 증시는 ‘K-디스카운트’의 짐을 벗고 ‘K-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는 전환점에 와 있다”며 “이를 가속화하려면 배당소득 분리과세 등에서 정부가 전향적으로 나서는 정책적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했다.
글로벌 IB “코스피 4500 간다”
글로벌 투자은행(IB)은 앞다퉈 한국을 아시아 주요국 중 가장 유망한 투자처로 꼽고 있다. 증시 체질 개선과 거버넌스 개혁 정책, 글로벌 유동성 완화에 힘입어 ‘K-증시’가 구조적 상승 국면에 들어섰다는 분석이다.
JP모건은 최근 보고서에서 아시아 시장 비중 확대를 권고하며 “한국을 최우선 투자처로 제시한다”고 밝혔다. JP모건은 “세계적으로 정책 환경이 긴축에서 확장으로 전환되고 있고 AI 투자가 확대되고 있다”며 “이에 따라 향후 6~12개월 동안 아시아 시장이 뜨겁게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이어 “국가별로는 한국이 최선호 시장이고 그 뒤로 인도, 홍콩·중국, 대만, 아세안 순”이라며 “종목으로는 SK하이닉스와 현대자동차를 추천한다”고 했다.

홍콩계 IB인 CLSA는 한국 시장을 더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CLSA는 “이재명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개인투자자의 적극적인 투자가 맞물리면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가 가능해졌다”고 분석하며 “코스피 지수는 30% 이상의 상승 여력이 있다”고 했다. 배당소득세율이 25%까지 내려가는 것을 전제로 코스피 지수의 4500선 도달이 가능하다고 내다본 것이다. 추천 업종으로는 반도체, 금융, 조선, 원전, 지주, K-콘텐츠 등 한국 주력 산업 대부분을 꼽았고 최선호 종목으로는 SK하이닉스, HD현대중공업,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제시했다.
골드만삭스도 한국 조선과 원전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게 평가하며 낙관론에 힘을 보탰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이전까지 외국인 자금은 반도체 대형주에 집중됐지만 최근에는 방산, 전력기기, 조선, 원전 등으로 선택지가 넓어졌다”며 “당분간 외국인 매수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전예진 한국경제 기자 ace@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