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경 투쟁의 대명사 격인 ‘골리앗 농성’(골리앗 타워 등 대형 크레인에서 벌이는 고공 농성)이 10일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벌어졌다. 4년2개월 만이다. HD현대중공업 노동조합원 20~30명은 이날 오전 40m 높이의 ‘턴오버 크레인’(선박 구조물을 뒤집는 대형 장비) 꼭대기로 올라가 ‘총파업, 총투쟁’ 현수막을 내걸었다. 사측 접근을 막기 위해 크레인으로 향하는 공간에 오토바이 수백 대를 빼곡하게 세웠다. 불법 파업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제한하는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 통과를 등에 업고, 주요 기업 노조마다 투쟁 강도를 높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4년2개월 만에 크레인 점거
조선업계에 따르면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 HD현대삼호 등 HD현대그룹 조선 3사 노조는 이날부터 일반 노조원이 참여하는 공동 파업을 벌였다. 전날 노조 간부를 중심으로 한 부분 파업에서 수위를 한 단계 높인 것이다.HD현대그룹 조선 3사 노조는 일단 12일까지 매일 7시간씩 부분 파업에 들어갈 계획이다. 12일에는 계열사 노조와 함께 경기 성남 HD현대 글로벌R&D센터(GRC)를 찾아가는 상경 투쟁에도 나서기로 했다. HD현대중공업 노조는 이와 별도로 GRC 앞에서 60일째 천막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노조는 이날 “고공 농성을 통해 최고경영자의 결단을 끌어내겠다”고 말했다.
HD현대중공업 노조는 지난 7월 노사 합의로 마련한 기본급 13만3000원 인상안(호봉승급분 포함)을 총회에서 부결시킨 뒤 강경 투쟁 기조로 전환했다. 노조는 월 기본급 14만1300원 인상(호봉승급분 제외), 전년도 순이익의 30% 성과급 지급, 정년 60세→65세 연장, 주 4.5일 근무제 도입, 상여금(750%→900%) 인상 등을 요구하고 있다. 또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 합병에 따른 직무 전환 배치, 싱가포르 법인 설립 이후 예상되는 이익 배분 등 경영상 판단에도 개입하겠다는 의견을 고수하고 있다.
◇납기 지연·마스가 타격 우려
업계에선 최근 국회를 통과한 노란봉투법을 노조의 투쟁 강도를 끌어올린 배경으로 지목한다. 불법 파업에 따른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 범위가 제한된 만큼 노조가 부담 없이 투쟁 강도를 높일 수 있게 돼서다. 마지막 고공 투쟁을 벌인 2021년에는 수백억원대 손해배상 가능성에 노조가 부담을 느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조선업계는 노조의 강경 투쟁이 이제 막 궤도에 오른 한국 조선업의 신뢰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한다. HD현대그룹 조선 3사의 수주잔액은 761억달러(약 105조원)로 3년이 넘는 일감이 쌓여 있는데, 노사 갈등이 장기화하면 납기를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제때 배를 인도하지 않으면 계약금액의 5~10%가량을 ‘벌금’으로 물어야 한다.
불안정한 노사 관계는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생산 안정성이 떨어지면 미 해군이 한국 조선소에 군함 건조와 선박 운영·유지·보수(MRO)를 맡기는 데 부담을 느낄 수 있어서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노란봉투법 통과 여파로 파업에 따른 손해배상 리스크가 줄어들자 노조의 ‘벼랑 끝 전술’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며 “정년 연장, 임금 인상 등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요구까지 내놓다 보니 협상이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다”고 말했다.
김진원/곽용희 기자 jin1@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