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테크(중국의 최첨단 기술)의 본진인 칭화대에서 느낀 낯섦은 한둘이 아니다.일단 캠퍼스 안 대형 운동장을 쉼 없이 뛰고 있는 학생들이 그랬다. 인공지능(AI) 반도체 관련 학과에 재학 중이라는 그들의 하루는 달리기로 시작됐다. 본인들이 속해 있는 연구실의 생활 규칙이라고 했다. 체력이 뒷받침돼야 더 오래 연구할 수 있다는 연구실 책임 교수의 철학 때문이다.
칭화대 '10년의 법칙'
칭화대에서 만난 이공계 교수는 하나같이 한국과의 협업이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연구 문화가 너무 다르다는 이유에서다. 한국 연구진은 단기간에 내놓을 수 있는 빠른 성과를 우선해 호흡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예전만 해도 종종 한국과 공동 연구가 이뤄졌는데 이렇게 ‘연구 호흡’이 다르다 보니 차차 멀어졌다고 한다.그도 그럴 것이 칭화대 내에는 암묵적으로 10년의 법칙이 있다. 완전히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성과를 내려면 적어도 10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그래서인지 인력 운용이나 연구비 책정에서도 일단 10년을 내다보고 장기 계획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외부에서 교수진을 영입해 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칭화대는 신규 임용 교수에 대해선 채용 직후 몇 편의 논문을 썼는지 등 정량적 평가를 최대한 자제하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제자들과 함께 신기술 개발에 몰입하거나 제자의 스타트업 창업을 지원해주는 사례가 유난히 많다.
올 초 생성형 AI 스타트업 딥시크가 주목받기 전 중국을 휩쓸던 문샷AI는 칭화대 컴퓨터공학과 출신 양즈린이 2023년 창업했다. 미국 오픈AI가 경계심을 드러낸 것으로 잘 알려진 중국 생성형 AI 기업 즈푸AI는 칭화대 컴퓨터과학과 지식공학실험실의 기술 성과를 사업화해 설립됐다. 칭화대 로봇 연구실에서 2023년 탄생한 스타트업 로봇에라 창업자는 칭화대 조교수인 천젠위다.
성과를 기다려주는 인내
‘만만디(慢慢的)’는 주로 중국인의 여유로운 기질을 표현할 때 쓰인다. 행정 절차가 늦거나 예고 없이 늦춰지는 답답한 시스템을 지적할 때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최근 중국 AI와 로봇 산업의 약진은 이 같은 만만디 문화에서 싹을 틔웠다.서둘러 성과를 내야 하는 환경은 실패를 용인하기 쉽지 않다. 장기 프로젝트는 뿌리내리기조차 어렵다. 10년의 법칙은 어찌 보면 만만디의 또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중국이 자체 AI 칩 개발에 나선다고 했을 때 국제사회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이미 글로벌 기업과 기술 격차가 큰 데다 몇 년 만에 이뤄내긴 쉽지 않은 일이라서다.
이 같은 냉소 속에서 중국은 10년 가까이 만만디 식 투자를 이어갔다. 당장 돈이 안 돼도 인재와 인프라에 투자를 계속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젠 로봇용 AI 칩을 설계하고 어느 정도 기술 자립화도 이뤘다.
물론 자국 내 방대한 데이터 자원과 톱다운 방식의 정부 주도 지원책, 거대한 시장 규모가 한몫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레드테크의 모든 성과를 정치 체제 차이로만 돌리기엔 궁색한 측면이 있다. 인재를 길러내는 시간, 성과를 기다려주는 인내가 정치 체제에서만 비롯되진 않아서다. 결국 시간을 쌓아 올리는 투자가 미래 산업의 성패를 가르게 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