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9월 08일 07:34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여천NCC 사태에서 이해욱 DL그룹 회장이 왜 직접 회의장까지 찾아가서 노발대발했을까요. 대형 로펌 자문을 받은게 확실하다고 봅니다."
최근 만난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이런 주장을 폈다. 한달 전 부도 위기에 내몰린 여천NCC 지원 문제를 두고 옥신각신하던 공동 대주주인 한화그룹과 DL그룹이 벌였던 분쟁 얘기다. 당시 이해욱 회장이 직접 회의장에 들러 "여천NCC는 신뢰 안가는 회사" "워크아웃이 해답" 등의 발언을 쏟아냈다. 이 같은 발언이 담긴 회의록이 외부에 공개되며 파장이 일기도 했다.
결국 정치권과 지역사회 여론까지 들썩인 끝에 DL 측이 추가 지원에 나서면서 사태는 일단락 됐다. "어차피 지원해야할 상황에서 이미지만 구겼다"라는 대중의 평가는 개정상법 이전이나 통용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이 회장 입장에선 추후 여천NCC가 회생에 실패할 경우, 적어도 여천NCC의 모회사이자 상장사인 DL케미칼의 주주가치 훼손을 끝까지 막으려 했다는 '증거'를 여기저기 남겨놓았다는 시각이다. 반면 한화는 '책임경영'을 내걸고 일찌감치 모회사인 한화솔루션의 금전 지원을 결정했다지만 추후 여천NCC가 반등하지 못하면 한화솔루션 이사들이 법정 소송에 시달릴 리스크를 안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지난 7월부터 시행된 개정 상법을 두고 기업들과 자본시장의 불안감이 증폭돼고 있다. 개정상법에선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고, 이사가 전체 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고 공평하게 대우해야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를 위배할 경우 이사들은 소수주주로부터 곧바로 민·형사상 책임에 직면하게 된다.
문제는 법이 명시한 주주이익의 정의에서부터 훼손 사례, 적용 시점 등 모든 문구가 모호하다는 데 있다. 법조계에선 명시적인 기준은 없지만 이사들의 의사결정이 10년 후까지도 소송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때문에 기업들과 사모펀드(PEF) 등의 컨설팅을 맡은 대형 로펌들만 특수를 누린다는 불만도 나온다. 일부 기업들은 이사들의 소송 위험을 막아주기 위한 보험료도 폭등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기업들 뿐 아니라 PEF들도 상법 개정 여파에 직격탄을 맞고 있다. 특히 기업과 콜옵션 및 동반매도청구권(드래그얼롱), 풋옵션 등 약정을 맺거나 메자닌 방식으로 대규모 투자를 집행한 PEF들의 회수 가능성은 모두 '백지화'됐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내달 SK스퀘어와 11번가 투자금 상환 문제를 두고 2차 협상을 앞둔 PEF들이 대표적이다. 상장사인 SK스퀘어 측이 이미 기업가치가 떨어진 11번가에 추가 자금 투입이 상법상 배임을 피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면 FI 측에서 반박할 이야기가 줄게 된다. CJ CGV의 중국 및 동남아 자회사인 CGI홀딩스에 투자한 MBK파트너스와 미래에셋증권도 비슷한 처지다. 카카오모빌리티,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등 카카오 계열사에 대규모 투자를 집행한 PEF들도 유사한 문제에 놓여 있다.
개정 상법의 가장 큰 부작용은 기업 경영과 자본시장 내 의사결정이 결국 주가로 대표되는 단기 주주가치로 귀결된다는 점이라는 게 IB 업계 지적이다. 여천NCC 사례처럼 당장의 산업 전망이 어두운 상황에선 지역사회 고용 유지와 산업 구조조정의 연착륙을 위한 자금지원이라도 모회사의 주가를 흔든다면 배임에 해당될 수 있다. 자금줄이 마른 기업들에 PEF들이 투자하면서 관행처럼 맺었던 주주간계약 이행도 이제는 법정에서 끝까지 다퉈야할 문제가 됐다. 제도권 금융에서 자금조달이 어려워 PEF를 찾던 기업들의 발걸음도 끊기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장기적으로는 기업에 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따.
일각에선 상법 개정이 오히려 기업들이 손쉽게 부실기업을 끊어낼 수 있는 문호를 열어준 것 아니냐는 시각도 나온다. 기업 입장에서도 '주주가치 보호'를 앞세우면 큰 비용 없이도 여천NCC나 11번가같이 한계에 몰린 기업을 한번 더 회생시키는 대신 파산시키거나 PEF에 떠넘기는 의사결정을 내리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차준호 기자 chacha@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