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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싸움'에 뛰어든다…나 그리고 너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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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싸움'에 뛰어든다…나 그리고 너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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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각또각.

    어둠을 뚫고 걸어나온 검은 법복 차림의 여성이 두꺼운 서류 파일을 스르륵 훑는다. 그의 이름은 '테사'. 성폭행 피고인을 대리하는 전문 변호사다. 연이은 승소로 자신감이 턱끝까지 차오른 그는 사법 시스템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적어도 '그날 밤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진 그랬다.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프리마 파시(Prima Facie)'는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남성을 변호해온 촉망받는 여성 변호사 테사가 직장 동료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진실을 입증하기 위한 고독한 투쟁에 나서는 이야기를 그린다. 인권 변호사 출신의 호주 극작가 수지 밀러가 썼고 2019년 호주 시드니에서 처음으로 무대화됐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성폭행 피해자를 구제하지 못하는 사법 시스템의 모순을 꼬집는다. '프리마 파시'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법률 용어로 그럴 듯해 보이는 표면 상의 진실을 뜻한다. 한꺼풀 벗겨보면 전혀 다른 진실이 드러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겉으로 보기에 테사는 직장 동료와 합의 하에 성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술에 취한 무방비 상태의 테사는 일방적인 피해자였다. 문제는 이를 입증할 물리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 겁에 질린 테사의 진술도 일관적이지 않다. 바로 이 점, 피해자의 증거 부족과 진술의 비일관성을 꼬집으며 법정에서 승기를 거머쥐었던 테사는 이들과 같은 입장에 처한 뒤에야 비로소 성폭행 피해 입증의 어려움과 사법 시스템의 구조적 한계를 뼈저리게 깨닫는다.

    과거 '법 기술자'였던 그는 이 재판이 "지는 싸움"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테사는 침묵하지 않는다. 짓밟힌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 얼굴 모를 다음 피해자를 위해. 그렇게 782일간의 투쟁을 이어간다.




    이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1인극이란 점이다. 한 명의 여성 배우가 서술자와 테사, 직장 동료 '줄리안' 등 최소 10명의 인물을 오직 목소리로 각기 다르게 표현한다. 지난 3일 테사 역을 맡은 배우 이자람은 소리꾼으로서 풍부한 무대 경험을 살려 1인 다역을 가뿐히 소화해냈다.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창(唱)'을 통해 다양한 배역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연극의 뿌리와 맞닿아 있다.


    특히 성폭행 사건을 기점으로 달라지는 테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성폭행 피해자들을 거침없이 몰아세웠던 테스는 이제 그들이 앉았던 그 의자에 주저앉아 손을 벌벌 떨고 있다. 성폭행 피해자들이 가해자가 아닌 자신을 탓하고 갈등하는 복잡한 심리도 현실감 있게 그려져 몰입감을 더한다. 공연은 인터미션 없이 2시간 가까이 이어지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 50페이지에 달하는 대사를 혼자서 쉼 없이 내뱉는 배우의 열연이 경이로운 수준이다.




    이야기는 무겁지만 무대는 심플하다. 무대 한가운데 놓인 직사각형 모양의 원목 책상과 의자, 램프 등의 소도구가 전부다. 배우는 가로, 세로, 대각선 배열로 책상을 직접 움직이며 장면을 전환한다. 거대한 책상을 힘껏 밀어붙이는 모습에서 법적 장벽에 맞서는 테사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이 작품은 런던 웨스트엔드, 뉴욕 브로드웨이 등에서 작품성을 널리 인정받았다. 2023년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즈에서 최우수 연극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토니어워즈에서도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여우주연상의 주인공인 영국 배우 조디 코머는 내년부터 영국과 아일랜드를 돌며 '프리마 파시' 공연을 이어간다.

    한국 공연에선 배우 이자람과 김신록, 차지연이 테사 역을 번갈아 맡는다. 배우마다 연기 스타일은 물론 소품, 러닝타임까지 차이가 있다. 오는 11월 2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한다.

    허세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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