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뜨거운 여름 사이로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할 무렵, 서울은 미술의 도시로 모습을 바꾼다. 9월 초 열리는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 기간을 맞아 도시 곳곳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거장들의 전시가 잇달아 열리기 때문이다. 연중 가장 많은 걸작, 신진과 중견 작가의 신작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올해도 KIAF-프리즈 기간 한국을 찾는 전 세계 미술 애호가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할 만한 ‘국가대표 작가’의 전시가 즐비하다. ‘물방울의 화가’로 잘 알려진 한국 현대미술 대표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은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을 수놓는다. 한남동 리움미술관은 세계가 주목하는 이불 작가의 전시를 준비했다. 올해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정면에 조각 작품 네 점을 설치한 바로 그 작가다.
실험미술 대표 작가인 성능경(삼청동 백아트)은 최근 미국 시카고미술관, 로스앤젤레스 해머미술관 등이 작품을 소장하는 등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김민정과 이강승(삼청동 갤러리현대), 이진주(원서동 아라리오갤러리)도 지금 한국 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 소격동 학고재갤러리는 대표 거장 김환기부터 젊은 작가 박광수까지 여러 작가를 두루 조명하는 기획전을, 창성동 리안갤러리 서울은 남춘모의 개인전을 준비했다.
국내 미술 애호가가 반길 해외 거장들의 전시도 곳곳에서 열린다. 루이스 부르주아(소격동 국제갤러리, 호암미술관), 시오타 치하루(평창동 가나아트), 마크 브래드포드(용산동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임스 터렐(한남동 페이스갤러리), 앤터니 곰리(한남동 타데우스로팍, 청담동 화이트큐브), 우고 론디노네(청담동 글래드스톤) 등 각국 미술의 대표 거장들이 서울을 찾는다.
전시 홍수에 휩쓸리지 않고 미술 축제를 제대로 즐기려면 가이드북이 필요하다. 지금 놓치면 후회할 서울의 추천 전시와 예술 이벤트를 서울 권역별로 정리했다.
소격동에 내려앉은 인류의 종말…'물방울' 김창열 회고전도
삼청동·강북권 전시


국립현대미술관(MMCA)을 중심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늘어선 서울 삼청동 일대는 ‘대한민국 미술 1번지’다. 경복궁을 비롯한 유적과 맛집, 카페 등 각종 즐길 거리가 넘쳐나는 덕분에 가을 나들이를 즐길 최고의 장소이기도 하다. 삼청동, 소격동, 원서동을 비롯한 강북 권역에서 놓치기 아까운 전시들을 도보 동선에 맞춰 정리했다.
걸어서 ‘미술 한 바퀴’


경복궁사거리에서 삼청동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국내 1호 상업화랑’ 갤러리현대가 있다. 구관에서는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작가 이강승과 캔디스 린의 2인전, 신관에서는 한지와 불을 사용해 동양철학을 표현하는 세계적인 추상화가 김민정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구관에서는 지난해 베네치아비엔날레 본전시 출품 작가인 이강승이 특유의 탁월한 미감으로 만들어낸 영상 작품 ‘피부’가, 신관에서는 지난해 스위스 바젤에 전시됐던 ‘산’ 연작을 눈여겨보자.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올가을 가장 주목할 만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물방울 화가’ 김창열 화백의 대규모 회고전이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이고 생전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지만, 그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전시는 6·25 전쟁이 김 화백에 남긴 깊은 상처가 영롱한 물방울 그림으로 승화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한국 현대미술 대표작들의 정수를 꽉꽉 눌러 채운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도 함께 둘러보면 좋다. 지하 1층의 서울박스에선 독일에서 활동하는 1990년대생 미디어 아티스트 추수의 ‘아가몬 대백과: 외부유출본’이 화제다. MMCA와 LG OLED가 파트너십을 맺은 첫 작품이다.

미술관을 나와 몇 발자국 걸으면 학고재갤러리가 나온다. 조선시대 도자기 ‘분청자 초엽문 편병’, 현대미술 거장 김환기의 소품, 박광수 지근욱 같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 등 ‘흙’을 주제로 펼친 깊이 있는 기획전이다. 바로 옆 국제갤러리에서는 20세기 최고의 여성 작가 중 한 명인 루이스 부르주아, 근래 들어 국내외 미술계에서 각광받는 한국계 콜롬비아 작가 갈라 포라스-김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열리는 부르주아의 대규모 전시를 본 뒤 감상하면 더욱 좋다.
정독도서관 정문 쪽으로 이동하면 아트선재센터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전설적인 작가’를 소개하는 미술관이라면, 아트선재센터는 ‘미래의 전설’들이 모이는 곳. 양혜규, 이불, 마크 브래드퍼드 등 수많은 작가가 이곳을 거쳐 대가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 아트선재센터가 올해 지하부터 옥상까지 대공사를 감행하며 전무후무한 전시를 마련했다.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가 ‘인류의 종말’이라는 주제로 제작한 강렬한 작품들을 압도적인 규모로 만날 수 있다. 미술관에서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어도 놀라지 말 것.
강북 구석구석 명품 전시들
정독도서관 바로 옆에도 좋은 갤러리가 많다. 실험미술 대표 작가 성능경의 전시를 열고 있는 백아트가 대표적이다. 80대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그의 창작력은 왕성하다. 작가가 직접 깎은 싸리 회초리를 휘두르는 퍼포먼스 작품을 비롯해 여러 신작이 나와 있다. 전시명은 ‘쌩~휙’. 인근 이화익갤러리에서는 한국화의 맥을 잇는 작가 허달재의 소품전이 열리는 중이다.


삼청동 선혜원, 원서동 아라리오갤러리, 창성동 리안갤러리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선혜원에서는 ‘보따리 작가’로 알려진 김수자의 전시가, 아라리오갤러리에서는 섬세한 채색과 세밀한 필치로 주목받는 이진주의 회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리안갤러리에서는 남춘모의 개인전이 열린다.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열리고 있는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시오타 치하루의 전시는 따로 시간을 내서 찾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 실을 재료로 삶과 죽음, 생명의 순환 등을 표현한 대규모 작품을 만날 기회다. 이 밖에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미디어시티비엔날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향수, 고향을 그리다’ 특별전, 성북동 제이슨함에서 열리는 이목하·한지형·조너선 가드너 등의 그룹전도 미술 애호가라면 놓치기 아깝다.

성수영/유승목 기자 syoung@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