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한국판 IRA’(국내생산 촉진세제)를 현재 설계대로 시행하면 국내 배터리 기업들이 받을 수 있는 환급액이 연간 300억원 안팎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생산·국내 사용’ 등 까다로운 환급 요건 탓에 수출 중심인 국내 기업들에겐 유명무실한 제도가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28일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정부와 여당이 입법을 추진중인 한국판 IRA로 국내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가 받을 수 있는 환급액은 300억원(올해 생산비용 추정치 기준) 안팎으로 추정됐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의 국내 공장에 납품하는 SK온을 뺀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는 사실상 환급혜택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 인플레이션방지법(IRA)을 참고해 만드는 한국판IRA는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산업 기업에 생산비용의 15%를 법인세에서 공제해주는 제도다. 여당은 내년 시행을 목표로 법안 통과를 추진중이다.
업계에선 수출 중심인 국내 배터리 기업과 동떨어진 환급 요건 탓에 ‘맹탕 IRA’가 될 것으로 우려한다. 한국판 IRA는 환급 대상을 한국에서 생산해 한국에 사용된 제품으로 한정하고 있다. 한국판 IRA는 배터리 뿐 아니라 반도체, 전기차, 디스플레이, 수소, 바이오 등 거의 모든 첨단산업을 한꺼번에 지원하는 법이다. 개별 산업지원 법안이 아니라 일괄 지원법이다 보니 산업별 특성이나 지원의 시급성 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은 각각 충북 오창과 울산 등지에서 생산한 배터리를 대부분 수출하기 때문에 환급받을 물량이 거의 없다. SK온은 국내에서 생산하는 현대차·기아에 전기차용 배터리를 납품하지만, 전체 생산 물량의 일부에 그친다. 지난해 배터리 3사 매출(48조4784억원) 대비 추정 IRA 환급액 비율이 0.06%에 그치는 이유다. 그나마 납부해야 할 법인세에서 빼주는 구조로 추진돼 창사 이래 매년 적자를 낸 SK온은 실제로는 지원금을 전혀받지 못할 수 있다.
반면 미국과 중국은 국내 생산 기준만 있을 뿐 국내 사용 조건 없이 현금으로 지원한다. 미국은 현지에서 1KWh짜리 배터리를 만들 때마다 45달러를 현금으로 준다. 미국에 공장을 둔 국내 배터리 3사의 올해 수령액만 3조원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이대로면 국내 투자를 활성화하겠다는 법안의 취지를 전혀 살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생산·국내 사용' 요건에…지원효과 유명무실
“푼돈 받으려고 수조원을 들여 한국에 공장을 짓는 기업이 나오겠습니까. 결국 인센티브를 많이 주는 해외로 떠나라는 얘기입니다.”
국내 배터리업계 고위 임원은 정부와 여당이 추진 중인 ‘한국판 IRA’(국내생산촉진세제)에 대해 “미국, 중국, 유럽이 어떤 인센티브로 글로벌 배터리 기업들을 유치했는지조차 파악하지 않은 것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한국판 IRA를 마련하는 취지가 해외로 떠나는 한국 첨단산업을 국내로 돌려세우기 위한 것인데, 정작 기업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인센티브가 없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국내 생산, 국내 사용’이란 환급 조건을 현실화해야 효과가 있을 것이란 의견을 내놨다.
◇무늬만 지원책인 한국판 IRA
28일 업계에 따르면 올해 생산량을 기준으로 추정한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의 한국판 IRA 환급액은 최대 20억원에 그쳤다. 법안에서 명시한 국내 생산, 국내 사용 조건을 충족한 제품의 생산 비용에 공제율 15%를 적용한 수치다. 각각 충북 오창과 울산에 배터리 공장을 둔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는 생산 제품의 대부분을 수출한다.
현대자동차·기아가 국내 공장에서 생산하는 전기차에 배터리를 공급하는 SK온은 그나마 300억원가량을 환급받을 것으로 추정됐다. 문제는 SK온이 2021년 설립 이후 한 번도 흑자를 내지 못했다는 데 있다. 한국판 IRA는 생산량에 비례해 현금 보조금을 주는 미국, 중국과 달리 해당 기업이 낸 법인세에서 보조금을 빼주는 방식으로 추진돼 법인세를 내지 않은 SK온은 한 푼도 돌려받을 게 없다. 세액공제 대신 현금을 환급해주는 방식은 재정당국의 반대가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설계한 법안대로라면 한국판 IRA는 배터리 3사에 ‘무용지물’이란 얘기다.
전문가들은 각 산업 특성에 맞게 산업별 개별 법안으로 재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판 IRA는 배터리뿐 아니라 반도체, 전기차, 디스플레이, 바이오, 수소 등 ‘첨단’이란 수식어가 붙은 모든 기업에 생산 비용의 15%를 보조금으로 주는 제도다. 특정 산업 특혜 시비를 없앤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업종에 너무 적은 예산을 투입하다 보니 ‘국내 사용’ 같은 까다로운 조건이 붙었다.
배터리뿐 아니라 한국의 거의 모든 첨단산업이 수출 위주인 만큼 ‘무늬만 보조금’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수출 구조를 내수 중심으로 바꾸지 않는 한 국내 공장을 새로 짓고, 기존 공장 가동률을 두 배로 끌어올려도 보조금은 똑같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국내에 이렇다 할 수요처가 없는 상황에서 내수 물량을 늘리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사용 조건을 넣은 건 국내에 공장을 설립하도록 해 고용을 늘리고 세수를 확충하자는 한국판 IRA의 취지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美는 생산비의 30~40% 보조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원조인 미국은 배터리 등 친환경산업 중심으로 법안을 촘촘하게 설계했다. 지원 규모도 훨씬 크다. 예를 들어 킬로와트시(㎾h)당 셀 생산은 35달러, 모듈까지 생산하면 45달러를 현금으로 지급한다. 총생산비의 30~40%를 돌려주는 셈이다. 기업의 예측가능성을 높이고 생산비용 절감을 유도하기 위해 생산비 비례 방식이 아니라 현금 고정 지급 방식을 택했다. 밸류체인별로 금액도 다르게 정했다. 배터리산업의 원가 구조와 투자 유인 효과 등을 따져봤기 때문에 구체적 법안을 내놓을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도 특정 산업에 맞춰 치밀하게 지원하고 있다. 중국은 구체적 계산식 등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배터리 기업에 생산량 등을 목표치로 두고 차등적 인센티브를 지급하고 있다. 적게는 수천억원, 많게는 수조원이다. 여기에 투자보조금, 연구개발비 175% 수준의 비용 공제, 토지·금융 지원 등이 더해진다.
중국 배터리 기업은 평균적으로 매출의 10~15%가량을 보조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터리 분야 한 교수는 “기형적 초대형 일괄법으로 추진하다 보니 세수 지출이 감당되지 않아 국내 사용 같은 조건이 논의되고 있는 것”이라며 “산업마다 특성과 시급성이 다른 만큼 개별 산업지원법으로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상훈/김우섭 기자 uphoon@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