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연합뉴스)
서학개미가 가장 사랑하는 미국 주식 ‘톱3’에 이름을 올린 팔란티어. 그럼에도 막상 팔란티어가 정확히 무슨 회사냐는 질문 앞에 쉽게 답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기업가치 평가의 대가 애스워드 다모다란 뉴욕대 교수조차 “팔란티어는 내가 완전한 가치평가를 보류하고 있는 유일한 회사”라고 표현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만큼 팔란티어의 사업 영역은 모호하다. 방산업체라고도, 데이터 컨설팅 회사라고도, AI 소프트웨어 기업이라고도 불리지만 어느 한 틀로 규정하기 어렵다.
‘팔란티어’라는 이름부터가 괴짜스럽다. 영국 작가 J. R. R.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 속 ‘천리안의 돌’, ‘멀리서도 들여다보는 돌’을 뜻하는 ‘팔란티르’에서 따왔다. 즉 팔란티어는 최고의 힘을 가진 자들이 적을 감시하고 정보를 탐색할 수 있게 도와주는 마법의 도구라는 의미다.
보통의 AI 스타트업과는 다르게 ‘국가안보’라는 사명으로 시작된 회사다. 팔란티어 CEO인 앨릭스 카프는 “실리콘밸리가 소셜미디어와 배달 앱에만 몰두해 의료·교육·군사 혁신은 뒤로 밀려났다”고 비판하며 그 빈자리를 팔란티어가 채우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AI 산업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기업임에도 관련 콘텐츠에는 여전히 ‘그래서 팔란티어 뭐하는 기업인데?’ 같은 댓글이 달린다. 팔란티어의 발음에서 따온 밈 ‘빨랑튀어’라는 댓글은 그다음이다.
팔란티어의 탄생 ‘테러를 기술로 해결해보자’
‘안보를 지키겠다’는 사명에 걸맞게 팔란티어 탄생의 중심에는 2001년 9·11 테러가 있다. 창업을 주도한 피터 틸은 “만약 우리가 데이터를 제대로 분석해 테러리스트들을 걸러낼 수 있었다면 9·11테러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창업의 계기라고 말한다. 미국을 무너뜨린 초유의 참사는 ‘데이터 분석을 통한 안보 혁신’이라는 팔란티어의 정체성을 낳았다.
당시 안보위기를 체감한 미국 정부는 팔란티어에 큰 관심을 보였다. CIA는 자체 벤처펀드 ‘인큐텔(In-Q-Tel)’을 통해 200만 달러를 팔란티어에 투자한 초기 투자자이자 핵심 고객사다. 이어 FBI, 국토안보부, 해병대 등 미국 정부 기관들이 잇따라 팔란티어의 고객사로 합류했다.
정부 기관의 지원 속에 성장하던 팔란티어는 실제 안보 현장에서 성과를 입증하며 존재감을 키웠다. 특히 9·11 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중적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성과 뒤에는 창업자들의 뚜렷한 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 공동 창업자인 앨릭스 카프와 피터 틸은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서구적 철학을 공통분모로 했다. 이들은 9·11 같은 비극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미국과 동맹국들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줘야 하며 소프트웨어 기술이 그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팔란티어의 유연한 정체성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팔란티어는 날것의 데이터들을 모아 의사결정에 유의미하도록 꿰는 역할을 한다. 팔란티어는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한다. “복잡하고 방대한 데이터를 수요자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의하고 분석해서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실시간으로 지원하는 소프트웨어를 정부와 기업에 판매한다.”여기서 의사결정의 주체는 한 공장의 생산직원이 될 수도, 군인이 될 수도, 사람이 아닌 AI가 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팔란티어 소프트웨어의 쓰임새도 다양해진다. 공급망 관리 도구가 될 수도, 기밀 군사 무기가 될 수도, 전략 컨설팅 담당자가 될 수도 있다. 팔란티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다.
팔란티어는 한 가지 정체성으로 규정할 수 있는 단일 제품이 아니다.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과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고객에 따라 달라지는 유연한 적응성이 팔란티어의 핵심 역량이다.
1) 팔란티어의 심장 ‘온톨로지’
팔란티어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온톨로지’라는 데이터 모델에 있다. 온톨로지는 단순한 데이터 분석을 넘어 데이터 하나하나에 의미와 관계를 부여해주는 모델링 기법이다. 흩어진 정보를 구조적으로 연결해 의사결정의 핵심을 빠르게 드러내도록 설계됐다.
이를 위해 엑셀이나 PDF, 텍스트, 이미지 등 여러 가지 형식으로 각 부서가 따로 관리하던 정보를 하나의 틀 안에 통합한다. 데이터의 인풋과 아웃풋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어 의사결정 과정이 단순해지고 소요 시간도 크게 단축된다.
효과는 실제 사례로 입증됐다. 패스트푸드 체인 웬디스(Wendy’s)는 공급망 담당자가 과거 24시간이 걸리던 업무를 단 5분 만에 처리할 수 있었다. 미국 통신사 AT&T 역시 새 통신선을 설치하는 데 통상 5년이 걸리던 작업을 팔란티어 플랫폼을 통해 불과 3개월 만에 끝냈다.
2) 국방 전문 플랫폼 ‘고담’
팔란티어가 처음 내놓은 제품은 국방용 소프트웨어 ‘고담(Gotham)’이다. 2008년 출시된 고담은 미 연방정부, 펜타곤, 정보기관을 위해 설계된 플랫폼이다. CIA와 초기 협업에서 탄생한 고담은 9·11 이후의 정보 수집 과제를 해결하도록 개발됐다. 지도, 그래프, 타임라인 등으로 데이터를 시각화함으로써 원시 데이터에서는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와 패턴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특징이다.
고담의 위력은 미국이 10년 동안 뒤쫓던 오사마 빈라덴의 소재를 찾으며 입증됐다. 빈라덴의 심부름꾼이 고담의 레이더망에 걸렸다. 그의 이동경로, 통화 시간, 현금 사용 기록에서 일정한 패턴이 발견됐고 이를 연결한 점선이 한 고급 주택가를 가리켰다. 팔란티어 분석관들은 빈라덴이 이곳에 숨어 있다고 확신했다. 이는 2011년 미 특수부대 습격의 성공으로 이어지며 21세기 정보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고담이 AI 전쟁으로 바꿔 놓았다. 카프 CEO는 전쟁 발발 3개월 만에 우크라이나로 직접 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고담을 무기로 제시했다. 실제로 무기 측면에서 열세인 우크라이나가 버틸 수 있었던 배경에 고담이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또한 아프간과 이라크에서는 급조폭발물(IED) 네트워크를 식별하는 고난도의 대테러 작전에 기여하며 실전에서의 가치를 입증했다.
3) 민간 영역으로의 확장 ‘파운드리’

팔란티어가 정부만 주고객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국방용인 ‘고담’으로 성과를 낸 뒤 사업 영역을 민간 시장으로 넓혔고 그 결과물이 바로 ‘파운드리(Foundry)’다.
파운드리는 기업이 보유한 방대한 데이터를 연결·분석해 실행 가능한 의사결정으로 전환해주는 플랫폼이다. 현재 전 세계 571개 민간기업이 파운드리를 사용하고 있으며 모건스탠리, 머크, 에어버스 등 글로벌 기업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활용 분야 역시 에너지, 항공, 조선, 제조 등 다양한 산업으로 확장됐다.
이는 실적에도 직결됐다. 매출 성장률은 정부 부문보다 민간 부문에서 훨씬 가파르게 나타났으며 전 세계적으로 민간 매출은 1년 만에 50% 이상 늘었다.
4) 독보적인 ‘파견 엔지니어(FDE)’
팔란티어가 독자적 경쟁력을 갖춘 이유는 ‘파견 엔지니어(FDE, Field Deployment Engineer)’ 모델 덕분이다. 소프트웨어 기업이지만 엔지니어를 고객 현장에 직접 파견해 문제 해결에 나서는 방식을 택했다.
FDE는 운영 담당자·분석가 등과 협업하며 실제 업무 흐름과 문제점을 세밀하게 파악한 뒤 그 결과를 바탕으로 팔란티어 플랫폼(고담, 파운드리 등)을 맞춤형으로 구성한다. 즉시 실행 가능한 코드와 솔루션을 만들어내고 이를 현장에서 바로 시험·개선한다.
초기에는 월가 전문가들이 “고비용·확장 불가 서비스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제기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팔란티어의 핵심 경쟁우위로 꼽고 있다. 고객과 깊이 얽힌 만큼 충성도와 전환 비용(switching cost)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일단 팔란티어 플랫폼 위에 핵심 운영 프로세스가 구축되면 다른 시스템으로 갈아타기 어려워진다.
최근 오픈AI 등 선도적 AI 기업들도 비슷한 FDE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5) 주가 폭등의 시작 ‘AIP’
(그래프=박명규 기자)팔란티어 주가는 2023년을 기점으로 폭등했다. 그해 4월 26일 공식 출시된 AIP(Artificial Intelligence Platform)가 그 불씨다. AIP는 이용자가 챗GPT나 라마 같은 대형언어모델(LLM)을 운영체제에서 골라 쓸 수 있게 한다.
AI 역량 부족이라는 평가를 받던 팔란티어는 2022년 말부터 오히려 경쟁사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됐다. 전환점은 본격적인 LLM 상업화 흐름이었다. 팔란티어가 20년 넘게 갈고 닦아온 온톨로지 기술이 빛을 발한 순간이다. 경쟁사들이 복잡한 데이터 전처리와 정제 과정에 발목이 잡힌 사이 팔란티어는 온톨로지의 구조화 작업으로 비용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AIP는 민간 기업 시장 공략 속도를 높이는 신성장 동력으로 꼽힌다.
성장세와 리스크
팔란티어는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올해 2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48.0% 증가한 10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시장예상치를 7.0% 상회했다. 사상 처음으로 분기 매출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올해 4분기 10억 달러 매출을 달성할 것으로 예측됐지만 돌파 시기를 앞당겼다. 주당순이익은 0.16달러로 시장 전망치를 16.4% 웃돌았다.특히 미국 정부와 국방 수요 확대와 대형 계약 효과가 매출 상승을 견인했다. 미국 정부 매출은 전년 대비 53% 증가한 4억2600만 달러를 기록했다. 기업 매출은 4억50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46.9% 늘었다. 미국 시장을 중심으로 고객사가 확대됐다.
한편 기업가치를 둘러싼 평가는 엇갈린다. 공매도 리서치 기관 시트론리서치는 “팔란티어 주가가 40달러까지 하락하더라도 여전히 고평가 상태”라며 최근 5000억 달러 수준으로 평가된 오픈AI와 비교했을 때 현 주가는 기업 펀더멘털을 넘어선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웨드부시증권의 애널리스트 댄 아이브스는 “지금은 도망칠 때가 아니라 기술주를 매수할 기회”라며 “팔란티어의 시가총액은 2~4년 내 1조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수아 인턴기자 joshua@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