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을 얘기해봤자 금융당국에 찍히면 더 손해예요. 문제가 있어도 그냥 모르는 척하고 살아야죠.”대기업 공시 실무진이 정기보고서 국제표준 전산언어(XBRL) 문서를 작성하며 내뱉은 푸념이다. XBRL은 기업의 재무 데이터를 컴퓨터가 읽을 수 있는 구조로 표준화해 활용성을 높이는 국제 규격으로 2023년부터 재무제표 주석에도 순차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공시 직원들은 분기·반기·사업보고서 발표에 맞춰 XBRL 문서도 작성해야 한다. 분기마다 바뀌는 기준에 따라 새로운 태그를 붙이고 오류를 수정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허비된다. 하지만 XBRL 데이터는 국제 규격에 맞지 않아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투자자를 위한다는 금융감독원 제도 개혁이 시장과의 소통이 아니라 ‘일방통행’식으로 이뤄져 벌어진 일이다.
정책 목표와 현실의 괴리
금융당국은 기업의 외부 컨설팅 비용을 줄이겠다며 XBRL 공시를 작성하는 편집기를 자체 개발했다. 작성 과정을 시장에 맡기고 당국은 결과물 검증에 집중하는 다른 국가와는 다른 방식이다. 해당 편집기에 해외 국가들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성과’에 대한 자화자찬도 아끼지 않았다.금감원은 데이터 표준화와 자동화 효과를 내세우지만 XBRL 주석 공시 의무화는 제도 취지와 달리 현장에선 혼란과 불편만 키우고 있다. 실무자들은 1주일 밤샘 작업도 불사하고 있다. 숫자 하나하나 태그를 붙이는 단순 노동을 해야 한다. 작업을 해놓고 자체 검증을 하기도 쉽지 않아 매번 금감원의 검수를 받아야 한다. 잦은 편집기 오류로 실무진은 고통을 호소한다.
투자자도 불편하다. 국내 XBRL 보고서 상당수는 국제 표준(core specification)을 충족하지 못하고 오류가 다수 포함돼 신뢰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감사보고서와 XBRL 문서 구조를 강제로 일치시키는 한국식 제도 설계가 데이터 분석 자동화를 어렵게 했고, 사업보고서를 눈으로 확인하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금감원은 문제를 실무자와 시장 탓으로 돌린다. “작성자가 잘못했다”, “투자자 활용 역량이 부족하다”는 식이다. 제도 설계와 시스템상의 결함은 축소하고, 책임은 현장에 떠넘기는 방식이다.
시장과 온도차를 자각해라
XBRL 공시 문제는 금감원이 제도 혁신이나 투자자 보호라는 명분 아래 시장과 대화하지 않고 보여주기식으로 제도를 밀어붙인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많다.금감원은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많은 정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정작 시장에서는 실효성을 느끼지 못하는 제도 개편이 대부분이다. 투자자 보호를 명분으로 기업공개(IPO), 유상증자, 분할·합병 등의 사안에 대해 마련한 정책도 마찬가지다. 금감원은 수차례 개입했지만 시장에선 도무지 금감원 기준을 종잡을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질적 심사가 늘어 금감원 ‘눈치보기’와 로펌 비용만 증가했다는 푸념이 많다. 투자자 보호라는 명분은 퇴색하고 기업과 투자자가 짊어져야 할 불확실성과 부담만 늘었다는 것이다.
자본시장에서 감독기관의 본분은 규제와 시장 개입이 아니라 투명한 규칙과 기준을 정하고 시장 참여자가 이를 지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시장에서 해결할 일을 일일이 관리하려 들수록 감독당국은 신뢰를 잃는다.
이찬진 금감원장이 새로 부임한 지금 필요한 것은 당국과 시장의 온도차를 자각하는 일이다. 당국이 ‘혁신’과 ‘투자자 보호’를 외칠 때, 시장 참여자들이 ‘피로’와 ‘불편’을 체감한다면 그 정책은 실패다. XBRL 제도 혼란은 그 온도차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금감원이 감독 본연의 기능으로 돌아가 시장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게 자본시장 신뢰를 얻고, 금융소비자를 보호하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