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라톤 뛰기 정말 힘들다.” 뛰는 것만 힘든 게 아니다. 참가 자체가 이미 치열한 경쟁이다. 국내 대회들도 신청자가 몰리면서 추첨이 기본이 됐다. 세계 7대 메이저 마라톤은 그보다 더 가혹하다. 고수 마라토너들도 버킷리스트에만 올려두고 평생 도전조차 못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메이저 대회에 나설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바로 ‘기부’다. 해외에서 마라톤이 단순 기록 경쟁을 넘어 ‘공헌의 운동’으로 자리 잡은 배경이다. 그렇다면 누가, 얼마를, 어떻게 기부하기에 참가권이 주어지는 걸까?
○‘채리티 런’이란
세계 7대 메이저 마라톤(런던·뉴욕·보스턴·시카고·베를린·도쿄·시드니)은 참가자가 특정 공식 자선단체와 계약을 맺고 일정 금액 이상을 모금하면 참가권을 준다. 주최 측이 수백 개 이상의 파트너 단체를 공개하면 러너는 관심 있는 단체를 선택한다. 예컨대 암 연구, 아동 복지, 환경 NGO 등이 있다.러너는 자신이 스스로 돈을 조달하기도 하지만, 친지, 지인, 기업 후원 등 다양한 방법으로 기부금을 모으기도 한다. 최근에는 SNS를 통한 크라우드펀딩이 가장 흔하다.
영국에 거주하는 샤레나는 지난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런던 마라톤에 참가했다. 그녀가 선택한 자선단체는 어린 자녀를 둔 가정을 지원하는 네트워크 '홈스타트 UK', 실제로 유년 시절 그녀를 도왔던 자선 단체다. 샤레나는 "제가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 홈스타트가 우리 가족을 구해줬다”며 “다시 한 번 이 단체를 위해 뛰게 돼 감회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뒤처지던 자신이 결국 케임브리지대에 합격하기까지 도와준 자원봉사자 '폴라 할머니'가 계셨다며 “런던 마라톤 완주를 통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나처럼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줄 수 있는 폴라 할머니를 더 많은 가정이 만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강조했다. 마음에 닿는 사연은 118명의 마음을 움직였고, 3663유로(약 594만원)를 모아 기준 금액(3000유로)를 넘겼다.
왜 굳이 ‘남’의 마라톤 참가를 위해 기부하는 걸까. 기부는 단순 숫자와 통계로는 결심하기 쉽지 않지만, 내 친구가, 직장 동료가, 혹은 내 눈에 보이는 저 사람이 42.195㎞를 달리면서 모으는 돈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연결된다. 즉, 기부자가 단순히 돈을 내는 게 아니라, 참가자의 도전을 ‘함께 완주하는’ 느낌을 받는 셈이다.

○세계 최대 원데이 모금 행사
2024년 런던 마라톤이 세운 숫자는 놀랍다. 단 하루 동안 모인 기부금이 7350만 파운드(약 1374억원). ‘세계 최대 원데이 모금 행사’라고 부를 만 하다. 이번 모금액은 2019년 세워진 6,640만 파운드의 종전 세계 기록을 또 한 번 넘어섰다. 1981년 첫 대회 이후 런던 마라톤 누적 기부액은 13억 파운드(약 2조 4301억원)를 넘겼다.참가자의 70% 이상이 채리티 러너로 등록하는 독특한 구조 덕분이다. 런던 마라톤의 자선 담당 책임자 사라 볼은 “2024년 마라톤 완주자 5만3000명 중 약 75%가 자선 단체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추산했다. 뉴욕(7000만 달러), 보스턴(7190만 달러), 시카고(3600만 달러)도 모두 지난해 사상 최대 모금 기록을 갈아치웠다.
아시아 유일의 메이저 대회 도쿄도 뜨겁다. 2025년 대회에서는 11억6800만 엔(약 110억 원)이 모금되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작년 7번째 메이저로 합류한 시드니 마라톤 역시 24개 이상의 대형 자선 단체들이 대기하고 있다.

○한국 마라톤 대회는?
한국의 마라톤은 아직 참가비 중심 구조다. 하지만 ‘달리기=사회 환원’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싹트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가수 션의 ‘815런’이다. 광복절의 의미와 독립 유공자에 대한 감사함을 되새기기 위한 기부 마라톤으로, 그는 국제 주거복지 비영리단체 한국해비타트와 함께 광복 80주년 캠페인을 열었다.서울 상암 월드컵공원에서 열린 ‘제6회 815런’ 오프라인 행사에는 시민 4000명이 함께 8.15㎞를 달렸고, 션은 81.5㎞를 7시간 50분 21초에 완주했다. 이날 참가비 전액과 110여개 기업의 후원을 합쳐 23억4850만6344원이 모금됐다. 수익금 전액은 독립유공자 후손 가정의 주거환경 개선 사업에 쓰인다.
대회를 완주한 기록은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그러나 모금된 기부금은 사회에 남는다. 달리기를 통해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마라톤이 단순 스포츠를 넘어 도시경제, 기업 ESG, 사회적 자본을 동시에 움직이는 플랫폼이 되어가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이혜인 기자 hey@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