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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비우고 아침은 채우다' 이토추상사에서 본 일·가정 양립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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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비우고 아침은 채우다' 이토추상사에서 본 일·가정 양립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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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이미 “이토추상사가 야근을 없앴다”는 소식은 알려져 있었다. 회식은 일찍 끝내고 밤 8시 이후 야근을 끊었다는 기사를 보고 상사는 일반 회사보다 일이 많을 텐데 정말 야근을 없앴을까? 현장은 어떤 모습일까? 무엇보다 눈길을 끈 건 “아침 8시 이전에 출근하면 무료로 아침을 준다”는 제도였다. 도쿄 한복판의 글로벌 상사가 어떻게 직원들에게 아침을 대접하는지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마음을 전하자 이토추상사 측에서도 “그렇다면 아침부터 일정을 시작하시죠”라며 흔쾌히 제안에 응해주었다. 이렇게 우리의 도쿄 일정은 이른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이토추상사 본사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구내식당으로 내려갔다. 직원들이 아침 일찍부터 북적였다. 이 회사는 아침 8시 전에 일을 시작한 직원에게 가벼운 아침을 ‘무료로 세 가지’ 챙겨준다. 바나나와 요거트, 샌드위치·주먹밥 같은 간편식이 놓여 있었고 직원들은 먹고 싶은 것을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었다. ‘밤새 버티는 대신 내일 아침에 집중하라’. 구호가 아니라 행동 인센티브로 설계된 장치였다. 회사 공식 설명에도 “오전 8시 이전 출근자에게 간편식 3종을 무료 배포”라고 못 박혀 있다. 아침식사가 먼저 철학을 알려준 셈인데 그 철학의 뼈대는 이렇다.

    2013년 이토추상사는 ‘야근을 끊고 아침으로 돌린다’는 원칙을 전사 규율로 선언했다. 밤 10시 이후 근무는 전면 금지, 8시 이후는 원칙 금지. 불가피한 추가 업무는 다음 날 새벽 5~8시에 하도록 유도했다. 그 대신 심야수당 수준(당시 50%)의 가산임금을 ‘아침 9시까지’ 확장했고 8시 전에 시작하면 가벼운 아침을 무상 제공한다는 원칙은 시범기간(2013년 10월~2014년 3월) 때부터 분명했다. 2014년 5월엔 제도를 정식 도입했다. 2022년에는 한발 더 나아가 ‘아침형 플렉스타임’으로 업그레이드해 코어타임 9~15시, 15시 조퇴 가능, 오전 7시 50분 이전 시작 땐 9시까지 25% 가산으로 정리했다. ‘밤을 비우고 아침에 보상한다’는 문장이 실제 시간표·임금·식사로 구현된 것이다.



    식당을 나와 회사 로비에 들어서자 태극기가 가장 먼저 반겼다. “오늘은 한국 손님이 주인공입니다.” 이토추상사가 회사 본점 로비에 역사상 처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사내 어린이집 ‘I?Kids’로 이동했다. 도쿄 한복판 미나토구 기타아오야마. 본사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자리했고 평일 오전 7시 30분~오후 7시(연장 오후 9시)로 운영된다. 지하철 가이엔마에(外苑前)역 도보 3분. “출근길에 맡기고 퇴근길에 데려온다”가 자연스러운 동선이다.

    이 보육시설은 2010년 1월 문을 열었다. 대기 아동 문제와 복직 난관을 회사 차원에서 뚫겠다는 초기부터 분명한 신호였다. 유리창 너머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고 교실 안은 낮은 가구와 책 코너가 아늑하게 배치돼 있었다. 단순히 시설을 둘러보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곳에 아이를 맡긴 부모, 교사에게 직접 물었다. “아이를 맡기면서 불편한 점은 없는지요?” “부모들의 만족도는 어떤가요?” 돌아온 답은 비교적 한결같았다. 부모는 “출근길에 바로 맡기고 퇴근길에 데러올 수 있어 편리하다”는 것이었다. 현장에서 느낀 건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직원의 생활 리듬을 고려한 ‘생활인프라’라는 점이었다.


    어린이집 방문을 마치고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이토추상사 인사책임자인 고바야시 부사장을 비롯한 임원진과 면담을 가졌다. 부사장과의 면담에선 제도의 ‘출발선’이 더 또렷해졌다. 2010년 사장 교체를 계기로 ‘일하는 방식의 개혁’을 아예 사내 전략으로 채택했다고 했다. 그해 회사는 회의·자료를 40~50% 줄이는 업무 다이어트(Workstyle Diet)부터 시작했고 2013년 ‘아침형’으로 허리를 꿰맨 셈이다. 회식은 1차까지만, 밤 10시 귀가라는 유명한 ‘110 운동’도 같은 맥락이다. 술자리를 일찍 마치고 다음 날 아침의 집중근무를 지켜내는 규범, 10년 넘게 굳힌 생활습관이다.

    정책의 효과를 물었다. 숫자는 명확했다. 사내 출생률(여성 직원 기준)이 2021 회계연도(FYE 2022)에 1.97. 같은 해 일본 평균 1.30, 도쿄 1.08보다 훨씬 높다. 회사는 이를 아침형 근무·야근 억제·보육·재택의 패키지 개혁이 만들어낸 결과로 설명한다. 현장을 돌아본 내 눈에도 그 설명은 과장이 아니었다. ‘출산 이후에도 계속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제도·공간·시간표로 엮어냈기 때문이다.


    이 ‘양립 인프라’는 최근 더 두꺼워졌다. 2022년엔 전 직원 대상 재택근무를 제도화했고 남성의 ‘유급’ 육아휴가 5일 의무화를 통해 남성의 육아휴가 사용률 100%를 목표로 하고 있다. 출산과 복귀가 ‘엄마 혼자’의 과제가 아니라는 것을 규범으로 못 박은 셈이다. 보육(공간), 시간(아침형·플렉스), 재택(방식), 부모 모두의 휴가(규범), 이 네 가지가 맞물린다.

    야근 억제는 문화로도 묶었다. ‘회식은 1차, 22시 귀가’의 110 운동은 일본 정부의 ‘일·쉼 개선’ 포털에 장시간 음주 억제→아침형 정착 사례로도 소개되었다. 고바야시 부사장은 야근 후 귀가하는 직원에 주던 택시비는 거의 제로, 전기요금 및 광열비도 줄었고, 간식 비용(인당 약 500엔)은 들지만 전체적으론 비용이 내려갔다”고 설명한다. 규율과 인센티브가 건강·비용·시간을 동시에 바꾸는 그림이다. 생산성은 어땠나. 회사 발표를 보면 2010년 대비 노동생산성(정의: ‘연결순이익 ÷ 본사 단체 직원 수’)이 2023년 기준 약 5.2배로 뛰었다. 인사·IR 문서에서도 ‘일하는 방식 개혁이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다’고 반복해서 밝힌다. 내가 현장에서 본 건 이 숫자의 안쪽, 즉 밤이 비면 아침이 더 촘촘해진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한국의 뿌리 깊은 야근 문화를 고치기 위한, 아주 현실적인 벤치마킹 모델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여성에 대한 적극적 우대조치(AA:Affirmative Action)로 여성 등용 차별철폐 조치와 ‘30년까지 전체 임원 중 여성을 30% 이상이라는 수치적 목표를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성 임원 비율을 확 끌어올린 점도 인상적이었다. 산업부 장관 시절 본부 국장에 여성을 적극 중용하여 성과를 낸 사례를 공유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더 적극적으로 여성들을 채용하고, 임원으로 발탁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여성 간부를 발탁했던 것이 기억났다. 이토추상사의 사례가 일본 내각에도 모범으로 소개되었다는 설명을 듣고 나는 곧장 물었다. “그렇다면 타 기업으로도 야근 없애는 문화가 많이 퍼졌습니까?” 답은 담백했다. “여건과 경영진 인식이 제각각이라 생각만큼 빠르진 않습니다. 무엇보다 최고경영진의 의지가 전부입니다.” 그 한 문장이 이날 메모의 밑줄이 됐다. 나는 이토추상사에 한국의 기업문화를 바꾸기 위해 기업과 학계가 공동으로 연구하여 해결책을 찾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이토추상사가 한국 기업과 더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성공사례를 공유해 줄 것을 제안했다.


    방문 마지막은 일본 기자단과의 30분 합동 기자회견이었다. 로비로 내려오며 다시 한번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 상징은 작지만 효과는 크다. 환대가 의제를 움직인다. 도쿄에서 챙긴 핵심은 결국 세 문장으로 정리됐다. 원칙을 바꾸니 문화가 바뀌었고(야근 금지), 사다리를 놓으니 경력과 출산이 같이 섰고(I?Kids·남성 육아휴가), 톱이 밀어주니 생산성이 따라왔다. 그게 이토추상사가 2010년부터 10년 넘게 증명해 온 서사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메모를 덧댔다. 한국의 야근 문화를 바꾸려면 야근 금지선(20시 이후 원칙 금지, 22시 이후 금지)을 먼저 긋고, 아침 인센티브(가산임금·무료 조식)를 바로 붙이고, 재택·보육 같은 생활 인프라를 한 세트로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최고경영진의 공개 약속, 이 스위치가 켜져야 현장이 움직인다. 도쿄의 6월은 내게 그렇게 남았다. 밤을 비워 아침을 채우는 법.


    도쿄에서의 여름은 서울의 가을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10월 JTBC ‘내일포럼 2024’에서 나는 저출생 반전에 성공한 나라는 사회 전체가 돌봄 체계를 갖추고 가족 친화적인 기업 경영문화와 사회 문화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고바야시 이토추상사 부사장은 포럼에서 이토추상사의 아침형 근무와 야근 없애기 사례를 ‘미래를 여는 근로방식 개혁’이라는 주제로 직접 소개했다. 포럼 전 별도로 한 만찬에서는 한·일 양국 간 협력을 더 촘촘히 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올해 6월 이토추상사 고바야시 부사장의 인터뷰가 하버드비즈니스스쿨 매체에 실렸고 관련 인쇄물을 한국에 보내오며 양 기관의 우애도 더 단단해졌다. 그리고 올해 7월 한국경제연구원의 ‘지금, 우리가 준비해야 할 미래’는 이토추상사 모델을 국내 해법의 맥락에서 소개했다. 정책만으론 부족하고, 업무 방식의 구조 개편이 함께 가야 한다는 메시지, 도쿄에서 본 장면들과 정확히 포개졌다.

    주형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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