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살의 나이에 데뷔해 국내외 유수의 콩쿠르에서 잇달아 우승했다는 사실은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을 설명하는 아주 일부의 수식어에 불과하다. 열일곱 살 김서현에게 음악은 인생의 거의 대부분이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말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면 평소에 말로 전하지 못하는 감정을 표현해 주는 듯하다”며 “말로 못 하는 감정을 바이올린으로 표현하는 희열이 있다”고 말한다. 타고난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이 지난 2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한경 아르떼필하모닉의 8월 정기공연 ‘한여름 밤의 낭만’에서 생상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타고난 지휘자이자 (공연) 프로그래머인 최수열은 생상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의 페어링으로 드뷔시의 바다를 선택했다. 전직 해군이었던 드뷔시의 아버지는 아들이 항해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드뷔시가 9살이 되던 해 파리 코뮌에 가담한 대가로 징역을 살게 되면서 직장과 시민권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후견인에게 맡겨진 드뷔시는 바다가 아닌 피아노를 만나 파리음악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드뷔시의 마음에는 항상 바다가 있었고, 음악의 색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자 마음속 바다를 교향시로 만들었다. 바다에 대한 마음을 타고난 드뷔시의 음악은 한여름 밤에 어울리는 손꼽히는 곡이기도 하다.
음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예 바이올리니스트와의 협주, 논리적 형식은 물론 형체가 없는 바다의 풍경을 그리는 인상파 작곡가의 교향시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꾸리는데 최수열은 주저하지 않았다. 지난해부터 시대를 넘나드는 레퍼토리로 호흡을 맞춰온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현악기들의 얕은 떨림을 뚫고 김서현이 활을 들자, 생상스 바이올린 협주곡 3번 1악장의 서주가 깊고 차분하게 울려 퍼졌다. 분명 힘이 있는 소리였지만, 김서현의 표정과 몸짓은 오히려 차분하고 고요했다. 자칫 감정이 과하게 드러날 수 있는 독주 부분에서도 김서현은 균형감을 유지하며 연주를 이어갔고, 오케스트라는 햇살과 바람이 되어 자연스럽게 바이올린의 소리를 감쌌다. 2악장에서는 김서현 특유의 청아하고 맑은 음색이 마치 무대 위로 새를 불러오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오보에나 플루트, 바이올린과 노래를 주고받을 때 세밀하게 음색을 바꿔가며 하모니를 이루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투명한 호수 같은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이어진 마지막 플라절렛(Flageolet, 현에 손가락을 가볍게 대어 울림을 강조하는 기법) 연주에서는 마치 새가 떠나가 멀리 사라지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이어 3악장에서 김서현은 긴장감과 비장미를 살린 서주로 객석을 다시 높은 산, 깊은 숲으로 이끌었다. 최수열은 낮은 자세로 악기들을 살피며 움직임을 세밀하게 조정했고, 그 사이로 시원한 바람과 같은 바이올린 연주가 객석 곳곳에 생동감을 전달했다.
고전적인 형식의 협주곡에서 바이올린의 정석을 보여주었던 김서현은 앙코르 무대에 올라 이자이 바이올린 소나타 3번을 연주했다. 바이올린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음표가 담겨있는 이 곡을 통해 김서현은 자신이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음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과 교류하고 싶은지를 몰입감 넘치는 연주로 표현했다.
드뷔시의 교향시를 연주하는 2부에서 오케스트라는 좀 더 볼륨을 키워 거대한 바다가 되었다. 일렁이는 물결처럼 입체적인 느낌을 한껏 살리며 시작한 첫 악장에서는 플루트와 하프, 오보에와 바이올린, 첼로와 호른 등 현악기와 관악기의 생동감 있는 대화가 물결의 다양한 층위를 묘사했다. 마지막 코다에서 볼륨을 높인 오케스트라는 온도를 서서히 높이며 따뜻한 햇살을 그려내기도 했다.

두 번째 악장에서 최수열은 온도를 한껏 낮춰 바다를 탐험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현악기는 물의 작은 흐름이 되고 목관악기는 그 속에서 춤추는 물고기로, 금관악기는 바다의 메아리로 변신했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어떤 생성과 소멸이 다이나믹하게 펼쳐졌다. 이후, 타악기와 첼로가 음산한 울림으로 긴장감을 조성하며 마지막 악장이 시작되자 다시 무대 온도는 다시 한껏 낮아졌다. 이에 대응하듯 목관과 금관이 높은 음으로 객석의 시선을 바다 위로 이끌자 파도가 휘몰아쳤다. 최수열은 거친 바다의 물결을 중재하며 지휘봉을 휘둘렀다. 그 지휘에 조화를 이룬 음표들이 절도있게 마지막 음표를 향해 달려가자 무대 곳곳에서 시원한 물보라가 일었다.
오케스트라가 일으킨 호쾌한 물보라에 객석이 박수로 응답하자 그 소리에 스네어드럼이 박자를 맞추며 첫 번째 앙코르 곡인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가 커다란 볼륨으로 울려 퍼졌다. 여름밤 불어오는 시원한 밤바람 같은 연주가 객석을 흥분시켜 박수소리는 더욱 뜨거워졌다. 이어 타고난 프로그래머 최수열이 두 번째 앙코르를 뜻하는 브이자 손가락을 보였고,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마지막 앙코르곡 맥스 스테이너의 영화 ‘썸머 플레이스(피서지에서 생긴 일)’ 테마가 울려 퍼졌다.
타고난 바이올리니스트와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보여준 고전음악의 향연은 어느 여름 축제현장을 부럽지 않게 만들었다. 객석도 모두가 타고난 축제의 구성원이 되어 그 순간을 한껏 즐겼다. 축제의 순간에 배우 류준열과 이상윤, 최태준과 박형식 등 특별한 손님도 함께했다는 후문이다.

조원진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