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학교에 다닐 때다. 학생들이 운영하는 방송반이 있었다. 가입 조건엔 ‘음반을 수집하는 회원 위주’라고 써 있었다. 그래서 방송반 지원을 포기했다. 집에 레코드는 고사하고 오디오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용돈으로 짜장면 4인분 가격이 넘는 레코드를 구입하는 친구는 학급에서 잘해야 60명 중에 3~4명이 전부였다. 아니면 예전부터 음반을 수집한 부모나 형제를 뒀거나.
어쩔 수 없이 라디오에 의존해 음악을 감상했던 나는 점심시간에 방송반에서 틀어주는 음악이 학창 생활의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당시는 성시완 DJ가 새벽에 진행하는 ‘음악이 흐르는 밤에’를 듣느라 늘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프로그레시브 록이 세상의 절반이라고 믿던 중학생 리스너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접한 앨범이 그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그날 방송반 초대 손님으로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던 친구가 등장했다. 평소 음악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은 관계라 신기한 마음으로 생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방송 진행자에게 자신이 애청하는 레코드를 소개하며 “이 음반을 통해서 재즈라는 음악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게다가 고가의 더블 앨범이라니, 부러운 마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친구가 소개한 음반은 배우 앤서니 퀸이 출연한 동명의 영화 오리지널사운트트랙(OST)인 척 맨지오니의 ‘칠드런 오브 산체스(Children Of Sanchez)’였다. 막연하게만 생각하던 재즈라는 장르를 누군가로부터 추천받은 최초의 경험이었다.
겨울 안개처럼 인식했던 재즈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관련 장르의 음반을 소장한 친구들을 찾아다녔다. 팝이나 록음악이 주류이던 1980년대에 재즈는 사막에서 발견한 오아시스 같은 장르였다. 비록 레코드 수집을 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카세트테이프는 수개월에 한 번씩 구입이 가능했다. 다음으로 접한 맨지오니의 앨범은 ‘필스 소 굿(Feels So Good)’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으로 플뤼겔호른을 껴안고 있는 이미지에 끌려 덥석 구매한 기억이 생생하다. 러닝 타임 10분의 음반 타이틀곡 ‘필스 소 굿’은 1978년 3분28초 분량의 싱글로 다시 발표됐다.
20대 이후부터 이런저런 레코드를 수집하면서 맨지오니의 음반도 함께 늘어갔다. 서울 황학동 중고음반 매장에서 백판으로 구입한 ‘체이스 더 클라우즈 어웨이(Chase the Clouds Away)’, 라이선스 레코드로 챙긴 ‘펀 앤드 게임스(Fun and Games)’에는 라디오 방송 황인용의 영팝스에 시그널 뮤직으로 나온 ‘기브 잇 올 유 갓(Give It All You Got)’이 수록돼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포옹하고 있는 사진이 담긴 ‘70 마일스 영(70 Miles Young)’ 역시 애청 음반에 속한다.
1940년 미국 뉴욕 로체스터의 이탈리아계 가정에서 탄생한 맨지오니는 1960년대에 하드밥 드러머인 아트 블레이키 밴드에서 활동했다. 크로스오버 재즈의 대명사로만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놀랄 만한 사실일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피아노를 연주한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마일스 데이비스와 디지 길레스피 세션 연주자로 기량을 담금질했다.
맨지오니는 형제와 함께 모던 재즈의 명가로 알려진 리버사이드 레이블에서 세 장의 음반을 내놨다. 그가 플뤼겔호른을 본격적으로 연주한 시기는 이스트먼 음악학교에 진학한 1958년 이후다. 1968년부터 1972년까지는 이스트먼 재즈 앙상블의 리더로 이름을 알렸다.
그의 시그니처 곡은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4위를 기록한 ‘필스 소 굿’이다. 음악 잡지 커런트바이오그래피는 ‘필스 소 굿’이 비틀스의 ‘미셸(Michelle)’ 이후 세상에 가장 잘 알려진 곡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2010년 한국에서 다섯 번째 내한 공연을 했다. 2015년 은퇴를 선언한 그는 2025년 7월 22일에 영원한 뮤즈의 세계로 떠났다. 플뤼겔호른의 마술사였던 척 맨지오니의 사운드. 나의 첫 재즈이자, 앞으로도 오래도록 기억될 음악이다.
이봉호 문화평론가·아르떼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