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객이 공연장을 누비며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찾아나서는 몰입형(이머시브) 공연의 대표작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가 마침내 한국에 상륙했다. '슬립 노 모어'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이머시브 장르로 풀어낸 공연으로, 서울 충무로의 옛 대한극장을 개조한 매키탄 호텔에서 21일 공식 개막한다.
바렛 연출은 20일 서울 충무로 매키탄 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머시브 공연은 관객이 하나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며 "자신이 원하는 코스로 탐험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옳고 그름은 없다"고 공연을 소개했다.
'슬립 노 모어'는 기존 공연 관람 방식의 패러다임을 바꾼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관객은 객석에 앉아있는 대신 건물 곳곳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는 배우들을 찾아 나선다. 관객 대기 장소인 맨덜리 바(1층)를 제외하고 6개 층을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하는 고강도 체험형 공연이다.
배우의 대사는 거의 없고, 현대무용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서사를 표현한다. 하지만 몰입도는 다른 어느 공연보다 높다. 배우를 바짝 따라다닌다면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도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배우가 관객 한 명만을 위해 펼치는 1대1 퍼포먼스도 있다.

'슬립 노 모어'의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가장 잔혹하다고 알려진 맥베스를 뼈대로 한다. 여기에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연출 스타일을 녹였다. 제목은 주인공 맥베스의 환청에서 따온 것. 스코틀랜드 장군인 맥베스는 장차 왕이 될 것이란 세 마녀의 예언에 눈이 멀어 잠자는 왕을 살해한 뒤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를 듣는다. "더 이상 잠들지 못하리라! 맥베스는 잠을 죽여버렸다."(Sleep no more! Macbeth does murder sleep.) 맥베스의 영원한 죄책감과 고통을 암시하는 말이다.
바렛 연출은 "'슬립 노 모어'를 처음 만들 때 '맥베스'로 표현하고 싶었을 뿐 아니라 '느와르 영화의 왕'인 히치콕 감독의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며 "관객들이 영화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길 바란다"고 했다.

'슬립 노 모어'의 원작사는 바렛 연출이 세운 영국 공연 제작사 펀치드렁크다. 2003년 런던에서 '슬립 노 모어'를 처음 보인 뒤 2011년 뉴욕, 2016년 상하이로 무대를 넓혀 흥행시켰다. 세계적 화제작을 국내로 들여온 것은 한국 공연 기획사 미쓰잭슨의 박주영 대표. 영화 투자·배급업에 종사하던 그는 2013년 뉴욕에서 '슬립 노 모어'를 처음 보고 신선한 충격에 빠졌다. "좋은 콘텐츠를 가지고 있지만 '스크린'이라는 경계 때문에 관객이 온전히 경험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끼던 때였어요. 그때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꿈 같은 장르를 보고 너무 반가웠죠. 그 기쁨을, 한국의 열정적 관객과 함께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준비했습니다."
한국 버전의 '슬립 노 모어'는 장기 임대료를 제외하고 초기 제작비만 250억원이 투입됐다. 한국 영화산업의 상징인 대한극장의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11개관 중 일부 공간을 남겨두고 평탄화 공사를 진행했다. 대한극장은 3000평 크기로 뉴욕과 상하이 공연장보다 규모가 크다. 박 대표는 "건축 설계부터 미술 디자인, 조명, 음향, 소품, 심지어는 먼지 한 톨에도 연출의 의도가 담겨있을 정도로 세세한 디테일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슬립 노 모어'는 한 시간씩 세 차례 공연이 반복된다. 그런데도 재관람률이 높다. 한 번의 참여만으로는 건물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서사를 파악하기 어려워서다. 맥베스와 레이디맥베스(맥베스의 부인) 외에도 최소 18개의 이야기가 한꺼번에 펼쳐진다. 한국 공연만을 위한 특별 장면도 있다. 이를 직접 보기 위해 해외 관객들이 지난달 24일부터 이어진 프리뷰 공연을 찾았다고 한다.

공연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총 23명. 뉴욕과 상하이 공연에서 활약한 외국 배우와 현대 무용가 중심의 한국 배우 34명이 번갈아 출연한다. 일부 배우가 전신을 노출하는 등 수위가 높은 편이라 관람은 19세 이상부터 가능하다. 관람료는 최소 19만원부터다.
바렛 연출은 한국 관객을 위한 관람 팁을 전했다. "어떤 장면을 보고 있는데 관객이 너무 몰려있다면, 비어있는 다른 공간으로 가보세요. (관객 밀집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다른 비밀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숨겨뒀습니다. 사람이 많은 그 순간이 오히려 선물을 찾을 기회입니다."
폐막일은 정해지지 않았다. 관객 호응에 따라 장기 공연도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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