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드십 코드에 중대재해 명시

20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 원칙)에 중대재해 리스크를 반영하도록 하는 개정 작업에 들어갔다. 2016년 12월 국내 도입 후 약 9년 만의 첫 개정이다. 새 정부 국정과제에 포함된 스튜어드십 코드 내실화 방안의 일환이다.
금융당국은 스튜어드십 코드에 중대재해 관련 내용을 구체화해 명시할 방침이다. 현행 스튜어드십 코드엔 ‘기관투자가는 투자 대상 회사의 재무구조, 경영성과 등 재무적 요소는 물론 지배구조, 경영전략 등 비재무적 요소까지 점검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고 돼 있다. 당국은 비재무적 요소에 기존 지배구조 내용뿐 아니라 중대재해 발생 여부 및 예방 조치 등을 구체화해 명시하는 방향의 개정을 논의 중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영국 등 해외는 자본 시장 상황 변화에 맞춰 여러 차례 개정했고 우리나라도 손질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세부 내용을 업계와 조율 중”이라고 밝혔다.
기관투자가의 실질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 평가 의무화도 추진한다. 그동안 시장에선 기관투자가들이 스튜어드십 코드에 가입만 한 채 적극적인 이행은 미흡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한국ESG기준원 등이 매년 스튜어드십 코드 준수 여부를 평가하고 그 결과를 공개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기준에 미달한 기관엔 페널티를 부여하고 스튜어드십 코드에서 탈퇴시키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당국은 하반기 시범적으로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 운용사를 대상으로 점검에 들어갈 계획이다.
◇“정상 사업 자금 조달까지 위축”
국민연금 등 주요 기관투자가가 중대재해 기업에 적극 의결권을 행사함으로써 사고의 책임을 묻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게 금융당국의 구상이다. 중대재해 사고가 반복돼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평가 등급이 내려가면 기관투자가들이 투자 자금을 회수할 수도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기관투자가의 투자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기업의 위험관리를 개선해나가는 데 의결권을 행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다만 사고 발생 후 책임 소재가 명확하게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업의 대출과 투자 등에 불이익을 주는 데 대해선 우려가 나온다. 단기적으로 안전 이슈가 부각된 기업이 사실상 투자 블랙리스트에 올라 정상적인 사업 수행을 위한 자금 조달까지 막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특히 중대재해 발생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건설 중공업 철강 화학 등 특정 고위험 업종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고 해당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약화할 수 있단 관측도 나온다.
사고 내용이 실시간으로 공시를 통해 중계되면서 주가 변동 폭을 키워 시장에 불필요한 혼란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기관투자가가 중대재해 기업에 페널티를 주면 다른 주주와의 분쟁 소지도 있다.
연금 사회주의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국민연금 등 공적 자금을 활용하는 기관투자가가 사회적 책임을 내세워 목소리를 높이면 기업 경영이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란 지적이다. 국민연금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중대재해 발생 기업의 투자 비중을 줄이도록 내부 규정이 마련되면 그 강도에 따라 손절매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했다.
신연수/서형교/민경진 기자 sys@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