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부에 고용이란 단어가 붙은 건 2010년의 일이다. 노동부가 부처로 승격된 지 30년 만에 이름이 고용노동부로 바뀌었다. 당시 초대 고용노동부 장관은 경제 관료 출신인 임태희 씨였다. 그는 고용노동부 출범 현판식에서 “경제 사회의 변화에 발맞춰 정책 패러다임을 바꾸고 산업사회의 노동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내는 부처로 거듭나야 한다”고 했다. 노동부를 노동 이슈보다는 거시경제에 기여하는 부처로 역할을 바꾸겠다는 취지였다. 그때부터 부처 약칭도 ‘노동부’가 아니라 ‘고용부’로 정했다.하지만 당시 노동부 관료들 사이에선 불만이 꽤 있었다. “우리는 사회부처인데, 왜 경제 논리로 부처가 움직여야 하냐”는 불만이었다. ‘사공’으로 불리는 사회부처 공무원들 사이에선 ‘경공’(경제부처 공무원)에 대한 열등감, 시기와 질투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내부 불만에도 불구하고 고용부는 지난 15년간 경제 부처들과 협업하며 고용 우선 정책을 주도했고 거시경제의 안정적인 운영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물론 몇몇 정부에선 옆길로 새긴 했지만….
노동부에 고용을 붙인 건 노동부가 더 이상 단순한 사회부처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갈수록 사회는 복잡다기해져 경제 영역과 사회 영역 구분이 모호해지고, 이에 따라 경제부처와 사회부처 영역 또한 중첩될 수밖에 없다. 노동은 기본적으로 사회 영역이지만, 노동과 고용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영역이다. 고용노동부가 스스로의 역할로 ‘노동시장 약자 보호’와 ‘양질의 일자리 창출’ 두 가지를 내세우듯이 경제 성장이란 과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다.
사회부처와 경제부처의 경계선에 있는 보건복지부, 환경부도 비슷하다. 노동과 마찬가지로 복지와 환경 역시 경제와 동떨어져 그 자체만으론 성립될 수 없다. 예컨대 복지란 것이 경제 성장과 배치되기보다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간다’는 개념이 정책 방향의 기본이 된 지 오래다. 환경 역시 경제 성장과 대척점에 서서 규제 측면으로만 접근할 게 아니라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서로 보완해야 할 존재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문제는 이런 균형 감각이 깨졌을 때 생긴다. 노동 정책이 양질의 일자리 창출보다 노동시장 보호에 과도하게 쏠릴 때, 복지 정책이 당장의 현금성 지원에 집중해 성장을 위한 재원 낭비를 초래할 때, 환경 정책이 경제와 산업의 수용 능력은 눈감은 채 맹목적인 목표 지향으로 치달을 때 균형은 깨지고 결국 경제에 독이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역대 정부는 경제부총리에게 조율사 역할을 부여했다. 기획재정부에 정책 조정 역할을 맡긴 것이나, 지금은 유명무실해졌지만 과거 녹실회의를 둔 것도 이런 취지에서였다. 때때로 사회부처가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예산권이라는 걸 무기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당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사회부처 목소리가 커지면서 균형은 심하게 흔들리고, 기재부 역할은 무용지물이 되다시피 했다. 이재명 정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더구나 이번 정부에선 기재부가 갖고 있는 예산편성권마저 빼낸다고 하니 견제 장치도 사라지게 됐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출신이 고용노동부 장관을 맡으면서 노동 후진국이라는 프레임에 스스로를 엮어 일자리 창출보다는 노동 권리 회복이라는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노란봉투법, 중대재해처벌법 등 취임 후 밀어붙이는 것들은 온통 ‘노동’ 일색이다. 마치 그동안 고용부라는 원치 않은 가면을 벗어던지고 노동부로 커밍아웃하려는 것 같다. 환경부 역시 실세 정치인 장관이 가면서 주요 정책 방향에서 경제 논리보다 환경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려는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급기야 산업통상자원부 관할이던 에너지까지 흡수 합병해 산업 위에 군림하는 부처로 행세를 할 참이다.
사회부처들의 공통점은 투입 대비 산출이라는 경제적 비용 개념이 없고, 규제를 통해 몸집을 불린다는 점이다. 규제는 경제 성장의 가장 큰 적이다. 이들 부처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경제 주체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각국이 각자도생을 위해 보호막은 높이고 내부 규제는 허무는 마당에 우리만 거꾸로 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