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아니스트 백혜선은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종로아트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백혜선은 다음 달 2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릴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의 사상 첫 내한 공연에서 협연자로 나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한다.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는 벨기에서 매년 5월 열리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반주를 맡아왔던 악단이다. 벨기에 클래식 음악의 심장으로 불리는 공연장인 ‘보자르’에 상주하며 플랑드르 악단의 정체성을 살려왔다.
“본선 하루 앞두고 18시간 연습해”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의 방한은 이번이 처음이다. 예술의전당 공연을 시작으로 다음 달 30일까지 6회의 한국 공연을 하기로 했다. 첫 서울 무대의 협연자인 백혜선은 1991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결선에서 이 악단과 합을 맞춰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현대음악곡인 파트리스 샬룰로의 ‘비탄의 도시로’를 연주한 경험이 있다. 당시 백혜선이 세운 피아노 부문 4위 기록은 아직도 한국인 피아니스트의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백혜선에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각별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2차 본선 연주를 24시간 앞두고 공개된 연주곡이 자신이 생각과는 다른 곡이어서 바짝 벼락치기를 했어야 해서다. “1차 본선에서 연주했던 (작곡가의) 곡이 또 나왔는데 전 그 곡이 다시 나올 거라곤 생각을 못하고 다른 곡들을 연습했었어요. 다음 날 오후 3시에 경선을 치르기까지 남은 24시간 중 저녁 두세 시간만 자고 밤새워 18시간 연습한 뒤에 무대에 나갔어요.” 결선 준비 기간에도 피아니스트 12명이 같은 기숙사에서 머물며 눈치싸움이 치열했다고.
34년 만에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와 선보일 협연 곡은 베토벤의 황제다. 뮌헨 필하모닉, 정명훈이 지휘한 런던 심포니 등과 백혜선이 협연했던 곡이기도 하다. 그는 “이 곡의 웅장함, 특히 2악장의 아름다움은 견줄 만한 곡이 없다”며 “3악장은 무도회로 데려가는 듯 경쾌하다”고 말했다. 선곡은 브람스, 베토벤, 프로코피예프 등 악단이 제시한 후보곡 중 악단의 정체성과 앞뒤 레퍼토리를 보고 백혜선이 결정했다.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는 이 공연에서 모차르트 ‘티토 황제의 자비’ 서곡, 브람스 교향곡 1번도 선보인다.
제자들 연주보면 “외계인과 접속한 것 같아”
백혜선은 ‘프로페셔 파이크(백 선생님)’로도 불린다.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NEC)의 피아노학과에서 단 둘뿐인 학과장을 맡고 있어서다. 러셜 셔먼에게서 배운 손민수, 동양인 첫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당 타이손 등이 이곳의 교수진으로 있다. 임윤찬, 김세현, 김송현 등 최근 활약하고 있는 한국의 젊은 피아니스트들도 재학 중이다. 교육관에 대해 백혜선은 “12살 같은 어린 나이의 제자에게 규격을 부여하는 데 초점을 둔다”며 “이후엔 점점 자율 교육으로 넘어가고 음악만 해선 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점을 꼭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연주에선 전체와 부분을 같이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부분적인 음에만 치우치다 보면 전체적인 드라마를 잊게 됩니다. 이건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임윤찬, 김세현, 김송현 등 세계적으로 활약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도 덕담을 건넸다. 연주하는 제자들의 모습에선 “외계인과 접속하고 있는 것처럼 무언가에 푹 빠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백혜선은 제자가 자신 못지않게 다채로운 연주를 선보였던 경험을 겪었던 손민수의 일화를 소개했다. “지금 나오는 피아니스트들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원체 많아서 빠르게 급성장을 할 수 있어요. 이런 연주자들이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와 가는 방향은 다르지만 어딘가를 가고 있는 거죠. 이들 중 누가 어떻게 주의를 끌 것인가는 그들의 몫입니다.”
교육자와 연주자로서의 일을 함께하면서 음악 인생에서의 균형감에 대한 생각도 많아졌다. “전 언제나 연주자이고 싶지만 언젠가 저희와 같은 (연륜 있는) 연주자들이 설 자리가 제자들에 의해 점점 줄어들 겁니다. 세대교체는 당연하죠. 다음 후세들이 어떻게 하면 잘 나올 수 있을까. 그리고 선생과 학생이 함께 설 수 있는 무대는 무엇일까. 이런 고민들을 하려 합니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