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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집합체 '럭셔리'…그 작은 떨림에 응답할 수 있겠나 [이윤경의 럭셔리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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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집합체 '럭셔리'…그 작은 떨림에 응답할 수 있겠나 [이윤경의 럭셔리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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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에겐 어린 시절 어머니의 꽃 그림 분첩통을 열 때 나던 은은한 파우더 향기로, 또 누군가에겐 여행지 우연히 들어선 부티크의 묵직한 가죽 공방의 향으로 기억될 수도 있다. 잘 다려진 차가운 침대 리넨의 감촉도 코끝에서 먼저 럭셔리를 감지한다.

    신기하게도 '럭셔리'는 우리의 감각으로 깊숙이 기억된다. 그 향은 단지 제품의 냄새로서가 아니라, 그날의 감정, 분위기, 오랜 귀족 가문에 초대받은 것 같은 상대방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인 감각으로 기억되곤 한다.


    최근 샤넬 부티크 한편에서 만난 70대 중반 한 여성의 핸드백 앞에서 한참 멈춰 서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핸드백 먼저 간 남편이 신혼 때 사 줬는데. 큼직해서 애들 키우면서 참 유용하게 잘 썼지. 이 백이 여태 파네."

    오랜 스테디셀러인 핸드백에서 그의 지난 50여년 동안의 삶의 추억과 가족에 대한 향수가 느껴졌다. 그의 추억에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만으로도 따듯한 감성이 전달됐다고 생각한다.



    “벨루티 로고를 볼 때마다 우리 아버지가 그리워요.” 어렸을 적 아버지가 애정 어린 손길로 만지작거리시던 벨루티 지갑이 눈에 선해 그리움이 몰려온다는 한 고객도 생각난다. 럭셔리 제품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향과 촉각 그리고 잿빛 시각의 기억들로 더욱 깊어지는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사물, 그 이상이다.

    우리는 종종 럭셔리를 고가의 제품, 희소한 소재, 장인의 손길 등의 키워드로 정의하곤 한다. 하지만 럭셔리의 본질은 그런 외형적인 것들보다 더 섬세하고 미묘한 ‘감성’이다.


    진정한 럭셔리는 감각의 설계에서 비롯된다. 고객은 제품을 사기 전 먼저 럭셔리한 공간을 걷고, 향기를 맡고, 음악을 듣고, 손끝으로 무언가를 느낀다. 그 모든 감각적 정보가 브랜드에 대한 무언의 첫인상으로 각인된다. 기분 좋고 긍정적인 감각은 트리거가 돼 감성을 자극한다. 고객을 꿈꾸게 한다.


    럭셔리의 기원으로 거론되는 로마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거리를 덮은 검은 화산암이었다. 로마의 거리에 깔린 화산암 조각을 '산피에트리니' 라고 부른다. 16세기 바티칸 베드로 성당 바닥에 처음 깔면서 그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로마는 화산의 도시라 현무암이 풍부했다. 말굽, 마차에 강하고 돌과 돌 사이는 자연스럽게 깨지고 마모했다. 이것은 500년이 넘도록 로마의 상징이 되고 있다.

    로마의 정통성을 잇는 브랜드 펜디를 오픈한 아델 펜디는 1932년 셀러리아 핸드백에 '쿠오이오 로마노' 가죽을 사용했다. 여기에 로마거리 산피에트리니의 질감 같은 오톨도톨한 느낌을 줬다. 나는 펜디의 셀러리아 핸드백의 감촉에서 천년 로마 거리를 달리는 아득한 전차의 소리를 듣는다. 브랜드가 전해준 감각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감성에 젖을 수 있다.



    '럭셔리(Luxury)'라는 단어는 라틴어 'luxus'에서 유래했다. 여기에는 고급스러움, 호화로움, 풍요로움이라는 감각적인 뜻이 있다. 또한 동시에 '넘침, 일탈, 과잉’의 의미도 담겼다. 럭셔리는 두 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우아함과 부러움의 상징이 된다. 그러다가 임계치를 넘어서면 바로 사치와 방탕, 허영, 즉 과함이 돼 버린다. 럭셔리 브랜드들은 이 아스라한 경계선에서 최대의 감각적 향유로 고객의 열망에 불을 지핀다.

    처음 럭셔리는 18세기 프랑스 귀족사회에서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패션, 가죽공예, 향수, 주얼리와 시계 등 럭셔리 브랜드의 고객은 까다로운 상류 귀족들이었다. 독특한 취향과 감성을 가진 고객의 열망을 읽으며 오랜 관계를 형성해 왔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고객을 감동시킬 수 있는지, 오랜 노하우를 축적해온 고객 관리의 장인들이기도 하다.


    고객들은 오랜 기억의 문을 두드리는 낯선 감각이 브랜드와 연결되는 것을 즐긴다. 럭셔리의 어원처럼 감성의 풍성함과 화려함에 감각이 닿는 것을 원한다.

    맥켈란 위스키 한 모금에서 오크 장인들에 의해 그을려 숙성된 다크 초콜릿과 말린 과일 향을 즐긴다. 백 년 자란 오크 나무가 품은 스페인의 하늘과 공기도 느낀다. 손목 위에서 숨 쉬는 롤렉스의 심장을 위한 섬세한 시계 장인의 체온을 간직한다. 감성이 없는 럭셔리는 그저 넘쳐흘러 버리는 값비싼 빈 거품이 돼 버린다.


    럭셔리 브랜드는 오래전 소수의 특정 계급을 위한 특화 브랜드였다. 지금은 공급과잉, 잉여의 시대에 ‘희소성’과 ‘정제된 아름다움’으로 그 부가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감성의 공유를 중시하는 Z세대들은 이러한 럭셔리 브랜드에 자신의 노고에 대한 보상과 가치를 기꺼이 지불한다. 그들은 제품만큼 풍요롭고 다채로운 경험을 즐기며 뉴 럭셔리의 장을 열었다. '고퀄 라이프스타일'이 일상인 그들은 그 시대의 귀족 못지않게 높은 기대와 욕구로 력셔리 고객이 됐다.

    팬데믹 시기 멈춘 소비에 대한 보상심리로 명품 브랜드 구매가 급증했다. 럭셔리 명품 브랜드들은 이 시기에 그 이전의 몇 배에 달하는 영업이익을 챙겼고 발 빠르게 제품 가격도 인상했다.

    하지만 백화점 명품관 앞에서 신발 끈을 고쳐 묶고 달릴 준비를 하던 한국 고객들의 오픈런은 시들해지고 있다. 여러 가지 경제적인 상황의 변화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코로나19가 촉발한 명품 소비가 약해지며 더 다양한 감성을 찾아 떠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는 럭셔리 브랜드들이 신발 끈을 고쳐 묶고 달릴 준비를 해야 한다. 고객의 순수한 열망을 빈 거품 같은 허영으로 바꿀 것인가. 럭셔리를 만든 옛 장인들은 그들의 고객이었던 귀족들의 눈썹 작은 떨림에도 그들의 열망을 읽어냈다. 예나 지금이나 고객은 감각으로 묻고 브랜드는 감성적인 태도로 답해야 한다.

    오늘 럭셔리가 당신에게 어떤 향기로 다시 다가오는가. 그 향은 먼 훗날, 당신 마음 어딘가에서 과거의 아름다운 잔향으로 지금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 당신이 열망하고 있는 그 럭셔리 제품 덕분에 말이다.

    이윤경 럭셔리인사이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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