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4,723.10

  • 30.46
  • 0.65%
코스닥

942.18

  • 6.80
  • 0.72%
1/4

[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 세상

페이스북 노출 0

핀(구독)!


뉴스 듣기-

지금 보시는 뉴스를 읽어드립니다.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 세상

주요 기사

    글자 크기 설정

    번역-

    G언어 선택

    • 한국어
    • 영어
    • 일본어
    • 중국어(간체)
    • 중국어(번체)
    • 베트남어
    매미울음이 그늘처럼 커진다 싶더니 여름방학이 끝났단다. 중학생 아들이 개학한 줄도 모르고 늦잠을 잤다. 요 며칠 사이 햇볕이 돔구장의 지붕처럼 내려앉아 헐떡거리는 개구리처럼 여름을 났다. 그리고 잠깐의 비와 입추.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부터 몸을 바꾸고 있다. 알다시피 매미는 땅속에서 팔 년을 보낸 후, 채 보름을 살지 못하고 죽는다. 단 2주를 위해 수컷은 울음으로 제 목숨을 태우고, 암컷은 침묵으로 알을 낳으며 목숨을 심는다.

    새벽빛이 올 때마다 매미 우는 소리가 아파트 10층까지 날아와 잠을 깨운다. 나는 이런 곤충들의 울음소리가 좋다. 지난해 그랬던 것처럼 올해도 여전히 울어주니 감사하다. 꺼질 것 같지 않던 이 매미 소리도 제 사는 시간만큼 산다는 것이 신비롭고 좋다. 이 지구상에서 어느 나무 둥치에 신이 브로치처럼 놓아두고 갔을 작은 생명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남김없이 살아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르겠다.


    나도 어느 한 시절 남김없이 살아냈는지 돌이켜보면 남김없이 돈을 쓰던 대학 시절이 떠오른다. 그 시절엔 용돈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이상하게 궁했다. 포항에서 보내 준 용돈은 하루이틀이면 동이 났다. 그래도 일주일 정도는 염치가 있어서 친구들에게 빌붙다가 그마저 어려워지면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돈이 없어.”


    “얼마 남았길래?”

    “10원….”



    그러면 엄마나 아빠 둘 중 한 사람은 은행으로 달려갔다.

    “어이구, 딸내미 굶어 죽게 생겼네. 앞으로는 10원 남았을 때 말고 몇만원이라도 남았을 때 전화해.”


    돈이 하나도 없다는 말보다 10원밖에 없다는 말이 훨씬 강력했던가 보다. 크게 나무라지도 않고 나를 불쌍히 여겨주던 말이 어릴 때 외운 주기도문처럼 잊히지 않는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혹시나 딸을 시험에 들게 할까 봐 서둘러 은행으로 가 돈을 부친 부모덕에 나는 돈 없이도 돈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친구들이 한 번씩은 빠져들던 다단계도 멀리했고, 주식에도 손을 댄 적 없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다고 써 붙인 알 수 없는 전단 앞에 한참 머문 적이 있긴 했어도 금세 마음을 고쳐먹고 엄마 전화번호를 눌렀다. 돈 벌 궁리를 하다 보면 세상은 돈 없는 사람들을 시험에 빠뜨리기 위해 설치된 구조물 같다.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 세상이 필요하다.

    중학교 학부모 참관수업 시간이 생각난다. 도덕 시간이었고 선생님이 질문했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고 월급을 받았는데 1만원이 더 들어 있다면? 1만원을 가질까? 1만원을 돌려줄까? 선생님은 정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솔직한 자기 생각을 묻는다고 덧붙였다. 많은 학생이 1만원을 자신이 갖는다고 대답했다. 믿었던 내 아들까지도. 하나같이 이유가 웃기고 귀여웠다. “사장님이 보너스로 주신 걸지도 모르기 때문에 감사히 받는다”라고 한 학생은 만약 100만원을 더 받았을 경우를 묻자 “다음날 알바를 그만두고 사장님이 모르는 나라로 떠나겠다”라고 말해 참관하던 학부모들의 웃음보를 터뜨렸다. 이 천진한 아이들이 시험에 드는 순간이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을까. 인간이 유약하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어떻게 하나 보자’라는 마음보다 권유하고 함께하는 마음이 귀하다는 걸 알겠다.


    기후 위기 시대에 더 이상 자연을 시험에 들게 할 순 없지…. 폭염 속 피켓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시위 현장에서 만난 한 분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매미 같은 울음 하나가 내 가슴팍에 달라붙은 듯 심장이 요동쳤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우리에겐 구원의 귀가 필요하다.





    - 염색되는 샴푸, 대나무수 화장품 뜬다

    실시간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