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권국에 주변국이 경제적 대가를 바치고 그 대가로 안정된 질서 혹은 시장 접근권을 보장받는 시스템.” 조공(朝貢)에 대한 현대적 정의입니다. 이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통상협상이 타결됐습니다. 협상이라는 말이 약간 어색하게 들립니다. ‘21세기형 조공’이라도 불러도 될 정도입니다. 경제적 대가를 바치고 시장 접근권을 보장받는다는 정의에 딱 들어 맞습니다. 한국은 국방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운신의 폭은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막무가내로 전 세계에 관세와 투자를 요구했습니다. 기존 자유무역협정(FTA)이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따위에 트럼프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앞에서 FTA나 과거 바이든 정부 때 했던 투자를 들먹이는 것은 오히려 협상에 독이 됐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한마디로 “(당신 끌어내린) 지난번 왕에게 많이 갖다 바쳤으니 조공을 줄여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답은 뻔하겠지요. “나하고 뭔 상관인데.”
시장의 평가는 분분합니다. “많이 내줬지만 선방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구체적 협상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정도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혹자들은 EU와 일본보다 늦게 시작한 것이 다행이라고도 합니다.
이번 협상에서 한국의 무기는 ‘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였다고 합니다. 어차피 한국 기업들은 미국 조선업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고, 미국도 군함 건조와 수리를 맡길 수 있는 우방이 한국 외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지점이었을 것입니다.
산업화 초기 무모하다 싶을 정도였던 창업자들의 선택과 도전이 후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조선업은 정주영 회장이 미포만을 막으면서 시작됐고 1984년 세계 1위에 오른 후 지금까지 세계적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미국과의 협상에 이 경쟁력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조선업 협력을 가장 중요한 레버리지로 쓴 것이지요.
반도체도 최혜국 대우를 받기로 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중국 외에 미국이 반도체를 구매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반도체에 엄청난 관세를 매기면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IT산업 경쟁력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미국 물가에도 악영향을 미치겠지요.
이건희 회장의 과감한 판단과 투자로 1994년 세계 1위에 오른 삼성전자, 오랜 기간 주인이 없었음에도 삼성을 바짝 추격했고 인공지능 시대에 HBM으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한 SK하이닉스가 한국에 있습니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미국과의 협상에서 굽신거리지 않을 수 있는 숨은 동력이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한국의 창업 1, 2세대가 만들어 놓은 세계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협상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포인트는 현재 기업인들의 역할입니다. 조선업 경쟁력을 미국과의 협상에 활용해야 한다고 아이디어를 내고 줄기차게 주장한 사람은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화그룹의 미래를 이끌 김동관 부회장은 미국으로 날아가 이를 측면 지원했습니다.
미국과의 또 다른 합의 항목인 미국산 LNG 수입 아이디어도 기업으로부터 나왔습니다. 한국은 1000억 달러어치를 수입하겠다는 카드를 썼습니다. 어차피 수입해야 하는 LNG를 미국산으로 돌리고, 한국의 수요와 일부 다른 국가의 수요를 합쳐 1000억 달러에 맞추는 아이디어를 낸 것도 SK그룹 계열사의 대표였습니다. 실제 다른 국가들의 수요를 끌어모으는 데도 SK가 직접 나설 예정입니다.
이처럼 한국 경제 창업자들의 모험, 관료들의 헌실적 노력, 기업들의 지원 사격이 합쳐져 트럼프 스톰의 첫 번째 고비를 넘은 듯합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합니다. 단기적으로는 미국과의 추가 협상이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10년 후, 20년 후 똑같은 조공 또는 협상을 미국이나 또 다른 나라로부터 요구받게 되면 한국이 쓸 수 있는 카드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때 써먹을 카드를 만들기 위해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을까요.
경쟁전략의 대가 마이클포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비교우위는 물려받는 것이지만 경쟁우위는 물려받는 것이 아니다.” 한국 경제의 창업 세대들처럼 새로운 모험에 나서 경쟁우위를 만들고 유지하지 않으면 어떤 비참한 상황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게 이번 협상의 교훈이 아닐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