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KoSIF) 사무국장

‘상장회사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신속 추진’. 이재명 정부가 대선 당시 중앙 공약집에 담은 ESG 의무 공시 공약이다. 그러나 여전히 내용은 모호하다. 적용 대상, 적용 시점, 공시 채널 등 핵심 정보가 빠져 있다. 다만 적용 대상만큼은 명확해졌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KoSIF) 대선 정책 질의서 답변에서 ‘자산규모 2조 원 이상 상장사’를 대상으로 한다고 밝힌 것이다. 답변서에는 ‘신속 추진’이라는 표현도 등장하지만, 신속 정도는 주관적이기에 가능한 시점은 2027년, 2028년, 2029년 정도로 고려할 수 있다.
기업 협회는 ESG 의무 공시화 시점을 2029년으로 요구하지만, 이는 국내외 투자자와 시민사회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는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크지 않다. 2027년은 주로 시민사회와 글로벌 금융 투자자들이 주장하는 시점이다. 주요국이 2025~2027년 ESG 공시를 시행했고, 우리나라 역시 산업구조 전환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점이 그 근거가 된다.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한 사업 보고서 공시를 감안하면 촉박하긴 하지만, 결국 정부의 의지 문제이기도 하다. 다만 현실적으로 2027년보다는 2028년 시행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사실 올해는 ‘ESG 의무 공시 원년’이어야 했다. 윤석열 정부가 문재인 정부 시절 발표한 ‘코스피 상장사 2조 이상부터 2025년 공시’ 로드맵을 ‘2026년 이후’로 폐기·수정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러나 윤 정부는 ‘준비 부족, 시기 상조, 기업 부담’ 등 기업 협회의 논리에 따라 시행을 미뤘다.
ESG 공시 법제화 논의는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다. 우리나라에서 ESG 공시 법제화 노력은 제18대 국회인 2010년 7월 박선숙 의원이 최초로 발의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제19대 국회에서 2건, 제20대에서 3건, 제21대에서도 3건의 개정안이 발의됐다. 또 현 제22대에서도 3건이 발의된 상태다. 지난 15년 1개월간 계속 논의됐지만, 모두 무산됐다. 하지만 찬반 논리는 예나 지금이나 닮은꼴이고, 준비 부족을 주장한 기업들은 그 시간 동안 사실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다. 기업보다 더 큰 책임은 정부의 미온적 태도였다. 기업 눈치를 보며 단호하게 결단하지 않은 당국의 책임이 크게 작용했다.
ESG 공시 의무화, 산업 전환의 핵심
ESG 의무 공시는 이재명 정부의 자본시장 정책, 산업 전환 정책, 기후 위기 대응 정책과 불가분의 관계다. 강력한 ESG 의무 공시 제도가 없으면 코스피 5000은 사상누각이며, 산업 전환과 기후 위기 대응은 결국 실패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ESG 공시 조기 의무화에 이재명 정부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ESG 조기 공시는 코스피 5000의 초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임투자원칙(PRI)은 2000년대를 ‘지속가능금융 시대’라고 규정했다. ESG 관련 법·제도 등이 급속하게 구축되면서 ESG를 투자 의사결정의 필수 요소로 고려하는 금융기관과 상품이 증가하고 있다. 현재 PRI에 가입한 기관 수는 5170개에 달한다. 글로벌 지속가능성투자협회(GSIA)에 따르면 전 세계 ESG 투자 규모는 2022년 기준 30조3000억 달러이며, 도이치뱅크는 2035년에 160조 달러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우리나라 기업이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ESG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면 어떨까. 해외 자금의 국내 자본시장 유입은 저해될 것이고, 국내 증시의 외국인 투자 비중이 30%에 육박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 자본시장의 가치도 저하될 수밖에 없다. 결국 ESG 공시 의무화가 지연되면 우리나라는 글로벌 ESG 금융시장에서 갈라파고스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이재명 정부의 코스피 5000 달성에도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것이다.
코스피5000특별위원회 오기형 위원장은 지난 7월 15일 ‘자본시장 제도 개선을 위한 입법과 정책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번 로드맵에는 자본시장 질서 개선을 위한 정책으로 ‘ESG 공시제도 강화’를, 자본시장 기반 강화 정책으로는 ‘국민연금 스튜어드십코드 활용’을 포함한다. ESG 이슈와 연계한 글로벌 금융기관의 투자 배제 확대도 우려 요인이다. 금융 배제 추적기(Financial Exclusions Tracker)에 따르면 2024년 기준 17개국 93개 금융기관이 135개국 5536개 기업 집단을 투자에서 배제했다. 자회사 단위로 보면 투자 배제 대상 기업 수는 6만6708개에 달한다. 이는 우리나라 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국내 기업 중 기업 집단 기준으로 99개, 자회사 단위로는 223개가 투자 배제 목록에 포함돼 있다. 투자 배제의 48%는 기후변화 악화와 화석연료 관련 사업이 주된 사유였다. 이 같은 현실은 ESG 경쟁력을 높이지 않을 경우 우리 기업에 장기 투자자가 아닌 단기 투기 자본이 유입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중장기적 미래 경영에 불확실성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수출 중심 국가, ESG 조기 공시 서둘러야
우리나라는 제조업 비중이 높은 수출 중심 국가다. 2024년 말 기준 수출 의존도는 중국 19.5%, 미국 18.7%, 유럽연합(EU) 10.0%, 일본 4.3%다. 일부 경제 단체는 이 같은 산업구조를 내세워 공시기준 완화, 공시 적용 대상 최소화 등 ESG 공시 조기 의무화 반대 논리를 펴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나라의 산업구조야말로 ESG 공시를 더 빨리 도입해야 하고, 인프라도 더욱 촘촘히 구축해야 한다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지금 전 세계는 ESG 이슈를 중심으로 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국가 수준’과 ‘기업 수준’에서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이 과정에서 ESG 이슈가 무역장벽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EU와 영국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기업지속가능성 실사지침(CSDDD),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이 각각 발의했고, 양당 모두가 지지하는, 미국판 CBAM인 외국 오염 수수료법과 청정경쟁법, 위구르 강제노동 방지법 등은 국가 차원에서 진행되는 무역장벽이자 공급망 재편의 일환이다. 국가 차원의 규제와 별도로 글로벌 기업도 자발적으로 공급망 관리에 ESG를 반영하고 있다. 444개 글로벌 기업이 참여하는 RE100은 기업 수준에서 진행되는 공급망 재편을 위한 대표적 이니셔티브다.
일부에서는 최근 트럼프 2.0 행정부의 반기후, 반DEI(다양성·포용성·형평성) 등 반ESG 정책과 EU의 지속가능성 규제 간소화 조치인 옴니버스 패키지(Omnibus Package) 등을 거론하며 공시 시기를 최대한 미루고 기준도 완화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심각한 착각이다. 트럼프는 반ESG 정책 시행에도 불구하고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해 ESG를 선택적으로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EU 역시 ESG 인프라를 충분히 구축하고 있는 상황에서 속도 조절을 하고 있기에 ESG 인프라가 턱없이 빈약한 우리나라와 단순 비교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공약을 살펴보면, 이재명 정부는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과 산업 전환을 통한 지속가능 성장을 추구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환을 위한 전제 조건이자 촉매제인 공시는 필수다. ESG 공시, 특히 기후 공시는 정보의 단순한 공개가 아닌 전환을 의미한다. 공개된 기후 정보는 자본의 효과적 배분을 가능하게 하고, 녹색기술 발전과 산업 전환을 유도해 저탄소·탈탄소 경제로의 전환을 촉진한다.
전 세계는 대전환 시대에 직면했으며, 전환의 궁극적 성과는 ‘지속가능성’ 제고다. 우리나라가 대전환의 파고를 넘기 위해서는 ESG 시장 참여자들이 윈윈(win-win)할 수 있도록 ‘ESG 선순환 생태계’를 조속히 구축해야 한다. 이 생태계를 작동하는 심장이 바로 ‘ESG 정보’다. 조속한 ESG 의무 공시 없이 ESG 활성화는 불가능하다.
정부는 올 10월 안에 공시와 인증 계획을 담은 ‘ESG 조기 의무 공시 로드맵’을 발표해야 한다. 이 로드맵에는 자산규모 2조 원 이상 법인이 2027년(2026년)부터 국제적 기준에 의해 법정 공시인 사업 보고서를 통해 정보를 공개하는 안이 담겨 있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서는 올해 안에 자본시장법 개정과 내년 상반기까지 시행령 개정이 필요하다.
이전 정부는 지나치게 기업의 눈치를 보며 ESG 공시 로드맵을 확정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시간 낭비였다. 이재명 정부는 더 이상 과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전환 시대에는 방향은 물론 속도가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지체된 ESG 시간을 만회할 필요가 있다. 이전 정부들이 DNA처럼 가진 추종 전략과 단호하게 결별하고, ESG를 선도한다는 관점에서 우리 기업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이재명 정부가 말하는 ‘진짜 성장’이 가능해진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KoSIF) 사무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