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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에서 런던 지나 북극까지 2만km...예술로 기후위기 알리는 '더 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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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에서 런던 지나 북극까지 2만km...예술로 기후위기 알리는 '더 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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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런던에 야생동물이 나타났다. 새벽녘, 상징적인 타워브리지를 건너 도심으로 들어온 100여 마리의 실물 크기의 코끼리, 기린, 사자, 가젤 등 퍼펫 동물들은 도시를 가로질렀다. 이들은 2025년 4월 9일 콩고에서 출발해 유럽 주요 도시를 거쳐 북극권까지 이어지는 2만km 여정을 수행 중이다. 남에서 북으로 이어지는 이 퍼포먼스는 기후 재난을 피해 이동하는 생명의 흐름을 상징한다. 열대우림에서 해빙 지대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여정은 생존을 위한 탈출이자 언어를 갖지 못한 존재들의 소리 없는 저항이다.

    전례 없는 규모의 예술 프로젝트이자 기후 행동 캠페인인 <더 허즈(The Herds)>는 지금이 행동할 때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술감독을 맡은 이는 팔레스타인 출신 연출가 아미르 니자르 주아비(Amir Nizar Zuabi)이다. 전쟁, 난민, 상실 등을 예술로 풀어내며 공동체 기반 프로젝트를 이끌어온 그는 2021~2022년 <리틀 아말(Little Amal)> 프로젝트로 주목받았다. 3.5m 신장의 난민 소녀 퍼펫 ‘아말’은 터키-시리아 국경에서 맨체스터까지 8000km를 걸으며 유럽 전역 공동체와 협업했다. <더 허즈>는 거리와 규모가 배 이상 확대된 이동형 퍼포먼스다. 해수면 상승으로 마을이 물에 잠긴 섬 주민, 가뭄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농부, 산불로 집을 잃은 사람들. 이들은 기후 재해 때문에 집을 떠나야 하지만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보이지 않는 난민이라 불린다. 100년 만의 불볕더위와 ‘역사상 최악의 더위’가 반복되는 시대에 기후 난민은 이제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 현실이다. 기후 변화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직접적인 생존 위기를 가져온다. 가뭄으로 먹이와 물이 부족해지고, 산불로 서식지를 잃기도 하며 북극곰이 살 수 있는 얼음 땅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느낀 듯, 거대한 퍼펫 동물 무리가 기후 재난을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난 6월 27일, 런던 타워브리지 야외공연장 더 스쿱(The Scoop). 원형 극장 주변으로 낯선 생명체가 나타나자, 객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한 관객의 개가 맹렬히 짖기 시작했다. 종이로 만들어진 퍼펫이 조종사들과 호흡하며 살아있는 동물처럼 움직이자,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퍼펫들은 공연장 주변으로 모여들어 사람들을 관찰했고, 키 큰 기린이 목을 내밀었다. 원숭이들이 난간을 따라 움직였고 치타는 객석 중앙 계단을 타고 무대로 내려왔다. 런던의 초등학생들과 어린이 전용 유니콘 극장이 함께 만든 무대에서 아이들은 율동과 노래로 미래를 이야기했고, 동물들은 조용히 그 장면을 함께했다.




    같은 날 오후, 극장과 상점이 밀집한 세븐 다이얼스에서는 뮤지컬 <마틸다> 팀과 협업 공연이 펼쳐졌다. 퍼펫 무리 사이에서 공연팀이 노래한 ‘When I Grow Up(어른이 되면)’은 아이들이 미래를 상상하는 곡이다. 이상 기후 속, 아이들이 희망을 노래하는 무대 앞으로 기후 위기를 피해 도망친 동물들의 모습이 교차했다. 한국 공연에서는 가사가 이렇게 번역됐다. “눈 부신 햇살 아래 온종일 뒹굴대며 놀 거야, 어른이 되면.”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우려가 엄습했다.


    런던은 전 세계에서 모인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다. 이곳의 예술은 다층적인 시선과 협업 속에서 만들어진다. <더 허즈> 프로젝트 또한 이런 토양 위에서 탄생했다. 런던예술대학교, 로열발레와 로열 오페라, 서머싯 하우스를 비롯해 거리 예술가들과 지역 단체들이 힘을 모아 거대한 예술 실험을 이뤄냈다.




    퍼펫은 아프리카 퍼펫 예술 단체 ‘우크완다(Ukwanda) 퍼펫 & 디자인 아트 콜렉티브’가 디자인한 모형을 바탕으로 런던예술대학교 학생들이 이를 확장해 실물 크기로 제작했다. 색을 칠하거나 다른 소재를 덧붙이지 않고 판지로만 인형을 만들었는데, 그럼에도 틈을 이용해 얼룩말의 줄무늬를 표현하는 등 아이디어가 빛났다. 이처럼 동물들은 종마다의 특징을 잘 드러내면서도 유연하게 움직였고, 퍼펫티어들은 동물들의 실제 움직임을 관찰하고 퍼펫과 함께 호흡하며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조종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훈련된 연기였고, 퍼펫은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도시마다 새로운 참여자들과 함께 ‘현장에서 다시 태어나는’ 공연이었다. 각 도시의 리듬과 공간에 맞춰 기획이 수정되었고 참여자들도 지역 기반으로 모집됐다. 이동을 줄여 탄소 배출을 줄이고, 현지 커뮤니티와의 연계도 강화하는 방식이었다. <더 허즈>는 환경 메시지 전달을 넘어서, 공연예술이 기후 위기 시대의 새로운 예술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국경과 언어,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 협력하고 상상하는 감각이야말로 지금 가장 필요한 능력임을 말해준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구체적인 몸의 감각으로 환기하는 이 퍼포먼스는, 예술이 어떻게 삶의 감각을 다시 세울 수 있는지를 묻는다.




    퍼펫을 활용한 공연은 영국 무대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장르다. 2007년 영국 내셔널 시어터에서 초연된 <워 호스(War Horse)>는 무대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물 크기 말 퍼펫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영국 전역을 돌며 공연되고 있다. 2022년 공개된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의 <이웃집 토토로(My Neighbour ToToRo)>는 다양한 크기의 토토로와 먼지 요정, 고양이 버스를 퍼펫으로 구현해 애니메이션 세계를 생생히 재현했다. 관객들의 눈높이가 높아진 오늘날, <더 허즈>의 단색 종이 퍼펫은 다소 투박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소박함은 고도화된 기술보다 몸과 숨으로 완성되는 단순한 창조가 얼마나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원과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모하는 공연 관행을 넘어서, 공연예술도 지속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 <더 허즈>는 거리에서, 일상 공간에서 관객을 만났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동물원을 찾아가거나 공연을 예매하지 않아도, 퍼펫들은 도시를 누비며 먼저 사람들 곁으로 다가왔다. 이는 익숙한 도시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감각적 경험이 됐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에 토마토수프를 끼얹고 도로를 막는 급진적 행동도 기후 위기를 알리려는 시도지만, 논란과 피로를 불러오기도 한다. 예술은 경고가 아니라 초대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종이 인형이 누군가의 시선을 돌릴 수 있다면, 그리고 잠시 멈추어 생각하게 만든다면, 그것만으로도 예술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효율이 중시되는 세상에서, 부질없어 보이는 이런 행동이야말로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다.

    정재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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