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의 색을 TV에 그대로 옮길 수 없을까.”
TV 제조업체들의 ‘기술혁명’은 이런 고민에서 시작됐다. 삼성전자는 입자 크기에 따라 다른 색깔의 빛을 내는 아주 작은 반도체 결정에 주목했다. 그 색깔이 순도가 높고 선명했기 때문이다. 바로 ‘양자점(퀀텀닷)’이다. 양자점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81년이다. 하지만 양자점이 산업 영역에 들어선 것은 문지 바웬디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화학과 교수가 1993년 양자점을 균일하게 생산할 수 있는 합성법을 개발하면서부터다. 이후 양자점 기술은 삼성전자 QLED TV뿐만 아니라 태양전지, 바이오 이미징에 이르기까지 응용 분야를 크게 확장했다. 바웬디 교수는 양자점 합성법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3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호암재단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바웬디 교수와 그의 20년 지기 동료인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를 관악캠퍼스에서 함께 만났다.
▷연구를 시작한 배경은 무엇이었나요.
바웬디 교수=주변 사물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었어요. 얼마나 많은 원자가 모였을 때 그 물체 고유의 성질이 드러나기 시작하는가. 예를 들어 얼마나 많은 원자가 모이면 여기 이 젓가락처럼 전기를 전도하는 속성이 나타나는지 이런 의문 말이죠.
▷하나의 기술이 상용화되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바웬디 교수=양자점의 개념이 1981년 처음 나왔고 제 연구가 소개된 것은 1993년인데, 삼성이 QLED TV를 출시한 게 2017년이니까 20~30년 걸린 셈이네요.
▷교수님의 연구가 없었다면 QLED TV도 빛을 볼 수 없었겠군요.
바웬디 교수=삼성이 QLED TV를 만드는 데 성공했기에 제가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노벨위원회는 기술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중요하게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노벨상이 가능했던 환경적 요인을 꼽아주십시오.
바웬디 교수=전 세계 연구자들이 부러워하는 미국의 연구 시스템 중 하나는 젊은 조교수에게 파격적인 혜택을 준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스타트업 패키지’입니다. 제가 1990년 MIT에서 조교수를 시작했을 때가 스물아홉 살이었습니다. 당시 MIT에서만 37만5000달러(현재 가치 약 92만달러)를 받았습니다. 패커드재단과 국립과학재단(NFS)에서 받은 금액을 더하면 100만달러(약 246만달러)가 들어왔죠.
▷돈을 주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바웬디 교수=좋은 아이디어만 있다면 조건이 거의 붙지 않습니다. 초임 교수가 처음부터 멋진 제안서를 쓰기는 어려우니까요. 당시 그런 지원이 없었다면 균질한 양자점을 생산할 수 있는 합성법을 개발해보겠다는 아이디어도 그냥 사장됐을지 모릅니다.
▷노벨상 공동 수상자 3명 중 2명이 벨연구소 출신입니다.
바웬디 교수=벨연구소는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연구자에게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하는데 그럼에도 연구의 자유도는 높았습니다. 절차도 간소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연구에 대해 ‘한 문단’만 적어서 제출하면 되더군요.
▷박사 학위를 갓 마친 시기 아니었습니까.
바웬디 교수=세계적 연구소 중 하나인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같은 곳은 피라미드 구조입니다. 석학들이 단장을 맡고, 그들에게 예산을 줍니다. 반면 벨연구소는 초임 박사후연구원에게도 권한과 연구비를 부여하는 수평적 구조가 특징이었어요.
▷과감한 투자네요.
바웬디 교수=예산과 함께 전권을 준 결과가 어땠을까요. 지금까지 벨연구소에서 진행한 연구를 통해 노벨상을 받은 수상자만 11명입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현 교수=한국에선 예산을 준 만큼 ‘감 놔라 배 놔라’ 합니다. 단장에게 자율권을 줘야 하는데, 관료 입장에선 사고가 터지면 책임져야 하니 그걸 피하려고 여러 규정을 만드는 식입니다.
▷그래서 한국 과학계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못하는 걸까요.
바웬디 교수=무엇을 발견하고, 그것이 노벨상으로 연결되기까지 최소 30년의 시간이 걸립니다. 저도 1993년 논문으로 2023년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다시 질문해볼까요. 30년 전 한국의 과학계는 어땠습니까.
▷비교 불가능한 수준이었습니까.
현 교수=바웬디 교수가 1993년 100만달러의 연구비를 받았을 때, 우리는 1만달러도 받지 못했을 겁니다.
▷30년 뒤에는 우리도 가능할까요.
현 교수=‘출발점’과 ‘도착점’이라는 측면에서 모두 아직 미국의 30년 전조차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도 포스텍, KAIST 정도가 스타트업 패키지를 늘리고 있지만 아직 충분치 않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이미 석학이 된 이들이 연구를 지속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점입니다.
▷‘도착점’이 다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현 교수=30년 이상 꾸준히 쌓아온 연구 결과들은 또 다른 유산이 됩니다. 최고 수준의 과학자에게는 ‘은퇴’가 없어야 하죠. 하지만 미국의 테뉴어와 한국의 테뉴어는 다릅니다. 미국은 종신교수지만, 한국에선 65세가 되면 정년으로 연구를 멈춰야 합니다.
▷국내 석학들의 중국행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현 교수=중국은 정년을 앞둔 과학자에게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냅니다. 석학 한 사람이 퇴직하면서 연구소 자체가 문을 닫는 경우도 많습니다. 큰 국가적 손실입니다.
▷기초과학이 중요한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바웬디 교수=기초과학 연구 없이 응용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 나은 디스플레이를 개발하기 위해 양자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양자점을 ‘발명’할 수는 없습니다.
▷기초가 있어야 응용도 가능하다는 의미군요.
바웬디 교수=mRNA 백신을 볼까요. 누군가가 ‘백신을 만들어야지’ 하고 뚝딱 만든 게 아닙니다. ‘mRNA는 세포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연구가 시작된 겁니다. 이런 연구가 축적되면서 mRNA를 이용한 백신 개발로 이어진 거죠.
▷과학자의 호기심이 인류에게 기여한 사례입니다.
바웬디 교수=거의 모든 기술은 그 뿌리를 따라 올라가 보면 세상을 이해하려는 기초과학의 호기심에서 출발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요즘은 모두가 인공지능(AI)만 얘기합니다.
바웬디 교수=AI보다는 머신러닝이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아직 진짜 ‘지능’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AI는 과거의 빅데이터가 있어야 학습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앞서 얘기한 ‘처음의 불꽃’, 호기심에서 출발하는 과학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최소한 제가 1993년 내놓은 연구 결과 같은 것은 AI가 절대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무언가가 있군요.
바웬디 교수=인간의 뇌는 매우 효율적입니다. 20와트(W)의 전력만 사용하죠. 반면 데이터센터는 어떤가요. 빅테크 기업이 전기료를 내느라 수익을 내지 못할 정도로 많은 에너지를 잡아먹죠. 전구를 켜는 데 필요한 에너지 수준으로 우리의 뇌는 AI보다 더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겁니다. 머신러닝이 인간의 뇌를 따라잡기까지 꽤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바웬디 교수는…
QLED TV에 쓰는 '양자점'…합성법 개발해 상용화 기여
2023년 노벨화학상의 주인공은 ‘양자점(퀀텀닷)’이었다. 양자점을 발견하고, 합성법을 개발한 세 명의 과학자가 공동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QLED TV에 쓰는 '양자점'…합성법 개발해 상용화 기여
양자점은 수백~수천 개의 원자로 이뤄진 나노미터(10억분의 1m) 단위의 반도체 결정체다. 알렉세이 에키모프 나노크리스탈테크놀로지 대표는 1981년 러시아 학술지에 입자 크기가 작아질수록 광학적 성질이 달라지는 ‘양자점 효과’를 처음으로 발표했다. 루이스 브루스 미국 컬럼비아대 명예교수는 나노 크기와 광학적 성질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립했다. 브루스 교수의 제자인 문지 바웬디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교수가 1993년 균일한 크기로 고품질 양자점을 생산할 수 있는 합성법을 발견하면서 본격적인 상용화가 시작됐다. 양자점이 디스플레이 재료 등으로 활용되려면 정확하게 동일한 색을 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양자점의 크기가 균일해야 한다.
현택환 서울대 석좌교수는 2001년 온도를 서서히 올리며 화학반응 하는 방법으로 균일한 크기의 나노 입자 합성에 성공했다. 현 교수의 연구를 계기로 다양한 크기의 양자점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