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 발레단의 한국인 수석무용수 김기민의 이름과 함께 전민철의 이름이 그들의 대화에 섞여 나오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별의 탄생을 예감하는 분위기가 그들 사이에 감도는 것 같았다. 이날 이른 새벽엔 드론 경보가 울렸지만 저녁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전쟁의 분위기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전민철은 러시아로 건너간 지 한달 만에 '라 바야데르'의 남자 주인공 '솔로르'로 신고식을 치렀다. 아직 러시아 당국 비자 발급이 진행중인 그는 게스트 아티스트 자격으로 주역이 됐다. 이달 비자 절차가 끝나는 대로 정식 솔리스트가 된다. 전민철은 지난해 가을 유니버설발레단의 '라 바야데르'에서 솔로르 역할을 맡은 바 있다.
'라 바야데르'에서 무사 솔로르와 무희 니키아는 신분 차이로 인해 몰래 만나는 연인 사이다. 그런데 국왕이 딸인 공주와 솔로르를 결혼시키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파국을 맞는다. 그 와중에 니키아를 연모하던 승려의 계략으로 인해 니키아가 죽음을 맞는데, 솔로르가 니키아의 영혼 앞에 속죄하며 끝을 맺는다.
마린스키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의 안무는 거의 유사했다. 이는 발레단이 전민철을 빠르게 마린스키 무대에 내세울 수 있었던 근거가 됐다. 무엇보다 무대의 연출, 동료들과 언어가 송두리째 달라진 낯선 환경 속 그가 3막의 공연을 무사히 마무리했다는 점은 격려를 받을 만 했다. 극동의 나라에서 온 새로운 무용수에게 러시아의 관객은 날카로운 평론가의 시선을 거둬들이고 6번의 커튼콜을 허락했다.

고대 인도의 왕국을 그린 '라 바야데르'는 '백조의 호수'나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같은 유럽을 배경으로 한 고전 발레와는 다른 결을 지닌다. 지난해 유니버설발레단의 공연 당시와 비교했을 때, 마린스키발레단에서 전민철이 연기한 솔로르는 보다 무게감이 있었다. 걸음걸이와 눈빛, 동작에는 신분 상승의 야망과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천진함 등이 자연스럽게 묻어났다. 데지레(잠자는 숲속의 미녀), 지크프리트(백조의 호수)와 같은 전형적인 왕자가 아닌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본인 나름의 연구와 분석을 거친 듯했다. 가벼운 점프, 재빠르게 회전하는 쉐네 등 전민철의 장기와도 같은 기술도 확인할 수 있었던 건 덤.
여주인공인 무희 니키아를 연기한 나데즈다 바토에바와의 2인무는 큰 실수 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사랑이 비극으로 치닫는 세시간의 여정을 섬세하게 표현해내는 데 어려움을 보였다. 슬픈 장면에서도 넘치는 에너지로 빠르게 춤을 추는 발레리나의 동작에 전민철은 서포트해주느라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이날 감자티의 역할로 처음 데뷔를 한 또 다른 발레리나 역시 혼자만의 동작과 감정선을 챙기기에 급급해보였다. 절반의 성공, 아쉬움이 남는 무대였다.

공연 직후 백스테이지에서 확인한 무대 바닥은 수평이 아니었다. 앞뒤 폭도 매우 넓은데다 뒤로 갈수록 경사가 높아져 심한 기울기가 눈에 띌 정도였다. 원근감을 살린 무대 연출을 위해서는 이같은 구조가 도움이 되지만 춤을 춰야하는 무용수에겐 무게 중심을 잡기 쉽지 않은 환경임이 분명했다. 이곳에서 회전을 크게 하며 뛰어오르는 '마네쥬'와 같은 동작은 더욱 애를 먹기 마련.
마린스키극장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발레 무용수들의 몸짓, 동작의 전개에 맞춰 연주된다는 것이었다. 지휘봉이 무용수의 동작보다 앞서는 일이 없었고 현악기, 목관악기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오케스트레이션 또한 공연의 수준을 높이는데 일조했다.

이날 한국에서도 스무명 남짓한 팬들이 전민철의 데뷔 무대를 축하하러 마린스키 극장을 찾았다. 객석 앞줄을 두루 채운 이들은 끝까지 남아 큰 박수를 쳤고 극장은 전민철이 등장하는 커튼콜로 그들의 성원에 보답했다. 막이 내린 무대 뒷편에서는 전민철을 가르쳤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김선희 명예교수,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그를 축하했다.
전민철의 마린스키발레단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유리 파테예프 발레마스터(전임 예술감독)는 "오늘 밤은 당신(김선희 교수)의 승리다. 김기민에 이어 전민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해보라"라며 전민철 데뷔 공연의 덕을, 두 사람을 길러낸 은사에게 돌렸다. 안드리안 파데예프 예술감독도 백스테이지에서 전민철의 데뷔를 축하하며 "(마린스키극장의) 관객들은 전민철이란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덕담했다.
한편 이날 출연자들이 퇴장하는 출구에는 한국에서 온 팬들과 현지 관객이 뒤섞여 인산인해를 이뤘다. 한 러시아 관객은 "매일같이 공연이 있는 마린스키극장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보기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이해원 기자 <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border:1px solid #c3c3c3" />※전민철의 마린스키 발레단 데뷔무대 풀 스토리는 오는 7월30일 발행되는 아르떼 매거진 8월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