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데이터’ 중심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각국 규제기관과 금융회사가 수치화된 ESG 지표를 중심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ESG 데이터가 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정보로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이 같은 흐름에 발맞춰 한국 정부도 관련 제도를 정비하고 있다. 환경부는 환경정보공개제도 개편을 통해 해외 사업장까지 포함한 온실가스 배출 데이터 확보 방안을 추진 중이며, 산업통상자원부는 ESG 데이터 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기반 마련에 나섰다.
산업부가 발주한 ‘디지털제품여권(DPP) 대응 한국형 데이터스페이스 구축’ 용역은 지난달 최종 보고 단계를 마쳤다. 이 용역은 국내 제조기업이 제품의 전 주기 탄소 배출량 등 ESG 데이터를 안전하게 관리하고, 국제표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유통하기 위해 추진됐다. 김앤장법률사무소, SK㈜ AX, 대한상공회의소가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했으며 법제 분석, 기술 설계, 산업계 수요조사 등 실무적 기반을 갖췄다.
◇ ESG 데이터, 디지털화 가속
각국 정부와 기업이 ESG 데이터를 정책과 전략의 중심에 두기 시작하면서 글로벌 ESG 공시도 단순 정보 공개에서 벗어나 디지털 전환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기업 지속 가능성 공시 지침(CSRD)을 통해 대기업을 대상으로 ESG 공시를 의무화했으며, 향후 모든 공시는 확장 가능 기업 보고 언어(XBRL) 기반의 디지털 포맷으로 제출하도록 할 예정이다.XBRL은 기존의 PDF 형식 중심 공시에서 벗어나 기계 판독이 가능한 구조로 ESG 데이터를 자동 수집·분석·비교할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수집된 ESG 정보는 규제기관의 실시간 모니터링, 금융기관의 투자 판단 등에 활용된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 역시 기업 ESG 데이터의 디지털 전환을 본격화하고 있다. ISSB는 글로벌 자본시장의 ESG 정보 표준화를 주도하고 있으며 유럽 외 지역에서도 ESG 데이터의 디지털 전환을 가속화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 제조업 데이터 통합 플랫폼 주목
이러한 변화는 산업 현장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독일의 BMW, 메르세데스벤츠, SAP, 지멘스 등은 2021년부터 ‘카테나-X(Catena-X)’ 프로젝트를 통해 자동차 밸류체인의 ESG 데이터를 디지털화하고 연결하는 산업 데이터 네트워크를 구축 중이다.카테나-X는 부품 생산, 조립, 유통, 재활용까지 제품 전 주기에 걸친 ESG 정보를 디지털 방식으로 통합 관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해당 프로젝트는 단순한 공시 대응을 넘어 제조업의 디지털 전환과 지속 가능성 혁신을 동시에 추구하는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참여 기업들은 탄소발자국 추적, 공급망 복원력 강화, 재활용 정보 공유 등 다양한 ESG-제조 융합 모델을 실증하고 있다.
나아가 EU는 ESG 데이터를 디지털화해 통상 전략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 중이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기업 지속 가능성 공시 지침(CSRD), 디지털제품여권(DPP), 에코디자인 규정(ESPR) 등 다양한 제도가 모두 제품 단위 ESG 데이터를 수집·분석해 규제에 적용하는 방식이다.
2027년부터는 전기차 배터리를 비롯한 일부 제품에 대해 원재료 채굴부터 사용 후 회수까지의 전 주기 ESG 데이터를 디지털 여권 형태로 실시간 등록하고 공유하는 시스템이 시행된다. 이는 단순 공시를 넘어 디지털 기반의 무역 통제 체계로 작동하게 된다.
ESPR은 제품 설계 단계에서부터 지속 가능성을 강제하는 ‘제품 중심 ESG 규제’로 내구성, 재활용성, 소재 구성, 탄소배출 등 수십 개 항목의 정량 데이터를 요구한다. DPP는 이런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담는 디지털 구현 수단으로 EU 시장 진입 티켓이 되고 있다.
◇ AI 시대의 핵심 자산, 제조 데이터
ESG를 포함한 제조 데이터가 전략 자산으로 부상하는 배경에는 인공지능(AI)이 있다. 윤성로 서울대 교수는 최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구글, 오픈AI, 팰런티어 등 글로벌 빅테크가 한국의 고품질 제조 데이터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제조 데이터는 AI 시대의 희토류”라고 말했다.구글, 아마존웹서비스(AWS) 등은 산업부의 AI 팩토리 사업과 관련해 국내 기업에 무상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안했으며, 앤드루 응 스탠퍼드대 교수는 대기업에 무상 컨설팅을 제공하는 대가로 제조 데이터 활용 권한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조 데이터를 통해 고도화된 산업 AI를 개발하려는 경쟁은 중국이 선점 중이다. 저장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제조 생태계는 온도, 진동, 납기, 불량률 등 수많은 공정 데이터를 수집해 딥시크 같은 국가 AI 모델에 학습시키고 있다. 중국 정부는 제조 데이터와 AI 기술의 융합을 핵심 국가 전략으로 삼아 데이터 기반의 산업 패권 확보에 나서고 있다.
반면 한국은 아직 제조 데이터를 전략 자산으로 규정하거나 보호하기 위한 정책적 논의가 미비한 상황이다. AI 반도체, 데이터센터 구축 등 기반 인프라는 논의되고 있지만 제조 데이터 관리와 유통, 공유를 위한 구체적인 제도나 플랫폼은 부족하다. 전문가들은 이 상태가 지속되면 국내 제조 데이터가 해외 플랫폼에 종속되거나 외국 기술 기업의 AI 모델 학습 재료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신호정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실장은 “ESG 데이터 플랫폼은 단순한 공시 대응을 넘어 산업 생태계 전반의 디지털 경쟁력을 결정짓는 인프라”라며 “정부는 조속히 디지털 및 데이터 주권 확보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승균 한경ESG 기자 olive@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