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고 보는 배우, 이희준을 말할 때 흔히 따라오는 타이틀이다.
이희준은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그리고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보여주는 연기자로 꼽힌다. 하지만 자연인 이희준은 명상을 즐기고, 대기 시간에는 그림을 그리며 생각을 정리한다고 했다. 국내 현대 미술계 스타로 꼽히는 쿤(KUN) 작가와 함께한 전시 'Edited Records / 편집된 기록'에서는 이런 이희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희준은 "따져보니 제가 그림을 그린 지 15년 정도 됐더라"며 "연기를 준비하며 상상하고, 사람을 관찰하며 그렸던 것들이라 판매하거나 전시할 상상을 해본 적도 없는데, 어쩌다 쿤 형이 제 노트를 보고 '전시해보자'고 해서 꺼내 보게 됐다"면서 쑥스러운 듯 미소를 보였다.

이희준의 어머니는 대구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전업 화가다. "엄마는 서양화를 주로 그리시는데,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어릴 때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엄마가 거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장면이 느껴진다"면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림을 접했다"고 말했다. 이희준에게 그림이 쉼과 힐링이 된 이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던 건 아니었다. 이희준이 본격적으로 드로잉을 시작한 건 그의 이름을 알린 드라마 KBS 2TV '넝쿨째 굴러온 당신'을 촬영할 때였다. 촬영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차피 사람 관찰하는 거 좋아하니, 드로잉북을 갖고 다니면서 그리자"고 했고, 이후엔 "라디오를 듣거나 술자리에서도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드로잉을 하다 보니 채색에 대한 충동도 들고, 그렇게 차근차근 충동에 따라 그렸어요. 제가 그림을 전공하거나 정식으로 배운 게 아니다 보니 느낌대로만 했는데 쉽진 않더라고요. 그러다가 쿤 형을 소개받고, 같이 협업도 하게 됐어요. 쿤 작가님이 키아프에 참여할 때 같이 작업하기도 했고요."

자유로운 이희준의 그림들은 그만큼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거친 느낌의 스케치에 그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이 담긴 흔적들을 더했다. 여행을 좋아하던 이희준이 그동안 모아둔 비행기와 기차 티켓 등이 드로잉에 더해지면서 작품이 완성되는 방식이다. 이희준은 겸손하게 "일기장과 같은 그림들이다"고 소개했지만, 쿤 작가와의 작품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밀리지 않는 모습이다.
전업 화가인 이희준의 모친도 "예전엔 그림을 보면 부족함만 지적했는데, 얼마 전부터 동료나 다른 작가분들이 칭찬해주셨는지 인정해 주신다"고.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갤러리엔 이희준의 지인들이 끊임없이 방문했는데, 이들 모두 감각적인 작품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전시회의 중심에 있는 인물화는 "시간이 없어 넷플릭스 오리지널 '허수아비' 촬영장을 다니면서 차에 싣고 가 그렸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와 존재감을 뽐냈다. 이희준은 "초코 아이스크림이 녹아 흘리면서 먹는 아들의 모습이 좀비 같아서 초록색 얼굴로 채색했다"고 설명했다.
이희준은 지난해에만 넷플릭스 오리지널 '황야', '살인자 o난감' 영화 '핸섬가이즈', '보고타:마지막 기회의 땅', 디즈니플러스 '지배종'을, 올해엔 영화 '귤레귤레', 넷플릭스 오리지널 '악연'을 내놓았고, 두번째 연출작 '직사각형, 삼각형'으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감독으로 공식 초청받기도 했다.
여기에 연극 '그때도 오늘', '꽃 별이 지나', '대학살의 신'까지 연이어 선보였고, 가수 홍경민과 신해철 추모 콘서트에 오르고 윤도현과 대학 축제도 함께했다. 쉴 틈 없어 보이는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지만 그의 일상 깊숙한 곳에 그림이 함께하고 있던 셈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 중에 눈길을 끌었던 것 중 하나가 '살인자o난감'으로 명명된 콜라주 형식의 그림이었다. 여러 이미지와 텍스트가 결합한 이 작품은 이희준이 '살인자ㅇ난감' 캐릭터를 분석하고, 촬영을 준비하며 그린 거라고 했다.
"작품을 할 때마다 그런 작업을 하고 있지만, 수준이 안 돼요.(웃음) 자기 검열을 하고, 공개할 수 있을 때 하려고 합니다. 지금 찍고 있는 '허수아비'도 구상하고 있는 건 있어요. 재밌는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고 있거든요."
이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우리가 아는 여러 유명인도 등장한다. 특히 그와 함께 작업을 했던 사람들의 초상화를 오려 붙여 완성한 작품에서 아는 얼굴을 찾아보는 건 소소한 재미가 된다.

그림을 그린 지 15년 만에 전시회를 열게 된 이희준에게 "다음 전시회는 언제 볼 수 있냐"고 묻자 "아마도 15년 이상 걸리지 않겠냐"면서 웃었다. 그러면서 "제 그림에 관심을 보여주시는 건, 제가 배우로 본업을 해나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며 "'앞으로 작업을 어떻게 하겠다'가 아니라, 본업을 잘해야 제 그림도 보고 싶지 않겠냐"고 냉정한 자기 평가를 내놓았다.
"전공자가 아닌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두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모르지 않아요. 그래서 저도 조심스럽고요. 작가로 그린다기보단, 배우 작업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 연기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표현하기에 가장 접근하기 쉬운 장치가 그림이었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해소되는 것도 있고, 즐거워요. "
스케줄이 없는 날, 쉴 때도 아이와 함께 그림을 그린다는 이희준이었다. 실제로 그의 전시장 한쪽에는 7세 아들과 함께 완성한 그림들도 전시돼 있었다. 아이가 그린 고양이와 이희준이 그린 아들의 얼굴을 굿즈로 만들기도 했다.
"저에게 그림은 휴식과 놀이에요. 콜라주 작업을 할 때도 시간이 정말 오래 걸렸어요. 하나하나 오리고, 칠하고, 미리 이렇게 저렇게 조합해보고, 붙여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게 놀이 같더라고요. 레고를 맞추듯. 틈틈이 계속 그림은 그릴 겁니다. 제 그림에 재미와 공감해 주시는 걸 보는 건 연기와 또 다른 신기한 경험이더라고요. 이것만으로도 큰 소득이라고 생각해요."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