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는 최근 10년간 자산가 유치 경쟁에서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 등 글로벌 금융 중심지를 앞지르고 있다. 영국의 컨설팅업체 헨리앤드파트너스가 지난 4월 내놓은 ‘가장 부유한 50대 도시 2025’에 따르면 싱가포르 내 고액 자산가는 2014년 14만9600명에서 지난해 24만2400명으로 62% 급증했다. 투자 가능 유동자산을 100만달러 이상 보유한 자산가 기준이다. 미국 뉴욕(45%)을 가볍게 제쳤다. 반면 홍콩의 고액 자산가는 10년간 3% 증가하는 데 그쳤다. 영국 런던은 브렉시트 등의 영향으로 12% 급감했다.

◇ 세금 대신 고용 할당
싱가포르에 슈퍼리치가 많아진 건 패밀리오피스를 적극적으로 유치한 결과다. 이를 통해 싱가포르가 직접적으로 얻는 것은 별로 없다. 상속·증여세를 면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정 정도 이상 자금을 운용하면 자본이득세도 내지 않아도 된다. 싱가포르 정부는 과세를 최소화하는 대신 패밀리오피스에 일정 수준 이상의 고용과 투자를 요구한다. 싱가포르 내에서 적극적인 기부 활동에 나설 것을 장려하기도 한다. 패밀리오피스가 세금 한 푼 내지 않더라도 싱가포르 경제 발전의 주요 동력으로 역할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싱가포르통화청(MAS)은 2023년 패밀리오피스 제도를 대폭 개정하며 개별 오피스당 의무 고용 인원을 정했다. 여기서 MAS는 월 3500싱가포르달러(약 375만원)로 최소 급여 기준까지 설정했다. 현지 금융사 관계자는 “고용 대상이 금융 전문가인 만큼 실제 월 급여는 1만싱가포르달러(약 1071만원) 이상일 것”이라고 했다. 금융사와 로펌, 회계법인 등에서 관련 업무를 하는 이들까지 감안하면 수만 개의 고급 일자리가 패밀리오피스를 통해 창출되고 있다.
패밀리오피스들은 싱가포르 내 각종 자산에도 의무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싱가포르 거래소에 상장된 주식과 리츠, 상장지수펀드(ETF)부터 비상장 기업과 채권 등에 투자해야 할 금액이 정해져 있다. ‘전체 운용 자산의 10%’ 혹은 ‘1000만싱가포르달러’(약 107억원) 중에 낮은 금액을 투자해야 한다. 패밀리오피스 자금이 싱가포르로 다시 흘러드는 선순환 구조다.
◇ 소비 장려하고 기부 의무화
운용 자산 규모에 따라 의무적으로 지출해야 할 비용도 정해져 있다. 모든 패밀리오피스는 매년 20만싱가포르달러 이상을 사용한 비용 내역을 제출해야 한다. 패밀리오피스들에 소비 활동을 권장하기 위해서다.싱가포르의 자선단체에 대한 기부도 의무화돼 있다. 운용 자산이 5000만~1억싱가포르달러면 연 50만싱가포르달러, 1억싱가포르달러 이상이면 100만싱가포르달러를 기부해야 한다.
상당수 패밀리오피스는 규정된 것 이상으로 기부 사업을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억만장자 로턱퀑은 패밀리오피스를 통해 2023년 1억2760만싱가포르달러를 지역 교육 및 의료 분야에 기부했다. 미국의 유명 금융인인 레이 달리오 역시 현지 패밀리오피스를 거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해양 교육 프로그램을 후원했다.
◇ 서비스산업도 동반 성장
패밀리오피스는 싱가포르의 서비스산업 구조도 바꿔놓고 있다. 기업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아 활동해온 로펌과 컨설팅업체들이 패밀리오피스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변신하고 있다.최근 몇 년간 싱가포르 로펌에서는 신탁 부문의 중요도가 높아졌다. 상당수 패밀리오피스가 신탁 형태로 자금을 위탁한 뒤 상속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패밀리오피스가 소유한 자산 및 기업 관리를 위한 법률 컨설팅도 로펌의 주요 사업 분야로 부상했다.
컨설팅업체도 패밀리오피스 설립 및 운영에 대한 컨설팅을 강화하고 있다. 은행에선 패밀리오피스의 각종 법률 문제를 상담하는 ‘PL(private law)’ 부문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패밀리오피스 전문 독립 신탁회사도 출현하고 있다.
싱가포르=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