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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박제됐던 장식품, 문고판 펭귄 타고 대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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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박제됐던 장식품, 문고판 펭귄 타고 대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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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아한 연미복을 입은 신사, 조류지만 날지 못하는 새, 뒤뚱거리는 귀여운 걸음걸이…. 펭귄은 위협적이지 않다. 남극 생태계 먹이사슬의 중간쯤 위치한 온순한 동물일 뿐이다. 그러나 1935년 출판계에 등장한 펭귄은 ‘책’의 개념을 뒤흔들어놓은 출판 혁명의 상징이다. 올해 90주년을 맞은 펭귄북스는 소수를 위한 무겁고 비싼 장식품이던 책을 누구나 손에 들고 다니며 즐길 수 있는 콘텐츠로 바꿔놨다. 전 세계 고전 문학을 추려낸 펭귄 클래식 시리즈부터 전자책과 오디오북까지. 극한의 자연환경에서 수천 년간 살아남은 펭귄처럼 인류와 함께 살아남을 책을 만들어 왔다.

    세계 최대 출판사 펭귄랜덤하우스의 전신 펭귄북스 출판사가 이달 창립 9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버지니아 울프, 오스카 와일드 등 대표 작가 90명의 작품을 새로운 표지로 선보이는 ‘펭귄 아카이브’ 90종을 최근 내놨다.


    펭귄북스의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다. 창립자 앨런 레인은 삼촌의 출판사 ‘보들리 헤드’를 물려받아 운영하면서 부침을 겪었다. 영문학사의 문제작으로 길이 남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출판하는 과정에서 이사회와 갈등을 겪었다. 돌파구를 고민하던 레인은 1934년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 기차역 서점에서 읽을 책을 사려 했다. 읽을 만한 책은 지나치게 비싸고, 싼 책은 내용이 허접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서 역사적인 날갯짓이 시작됐다. ‘담배 한 갑 가격인 6펜스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훌륭한 책을 만들자.’

    당시 책은 책장에 모셔두는 사치품이었다. 가죽으로 표지를 장식해 비싸고 무거웠다. 앨런은 펭귄북스를 세우고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가벼운 ‘문고판’(paperback)으로 책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펭귄북스가 출판 역사상 처음 문고판을 세상에 선보인 건 아니다. 하지만 펭귄북스처럼 꾸준히 문고판을 내놓은 출판사는 없었다.


    앨런은 출판사 이름과 로고를 고민하다가 비서의 제안으로 펭귄을 택했다. ‘품위 있는 익살’을 보여줄 수 있는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앨런이 디자이너 에드워드 영에게 런던 동물원에 가서 펭귄의 생김새와 움직임을 관찰해 스케치로 기록한 뒤 로고 디자인에 반영하도록 한 일화는 전설처럼 전해진다.

    사람들은 조롱했다. <1984>를 쓴 ‘정치적 글쓰기의 대가’ 조지 오웰조차 “5실링을 가진 고객은 책은 한 권만 사고 남은 돈은 영화 티켓 등으로 낭비할 것”이라고 냉소했다. 서점들은 외면했다. 값싼 책은 팔아봤자 남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앨런은 오늘날 다이소처럼 저렴한 생필품을 파는 잡화점 ‘울워스’에서 펭귄북스 책을 팔기 시작했다. 자체 자판기까지 개발했다.


    첫 책으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애거사 크리스티의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등 10종을 냈다. 독자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저렴하고 질 좋은 책’에 목말라 있던 독자들은 펭귄북스에 열광했다. 펭귄북스는 첫해에만 약 300만 권을 판매하며 책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펭귄북스가 지금의 자리로 도약한 데는 2차 세계대전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전쟁 와중에도 600권 가까운 책을 펴냈다. 교육 기회를 잃은 전쟁 세대와 군인들에게 펭귄북스의 책은 주머니 속의 교실이었다. 육군 전투복 무릎 언저리에 달린 주머니가 ‘펭귄 포켓’으로 불릴 정도였다.


    펭귄북스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시리즈는 단연 ‘펭귄 클래식’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번역본을 시작으로 셰익스피어, 헤밍웨이, 제인 오스틴, 도스토옙스키 등 고전 문학 작품을 일관된 디자인으로 담아냈다. 과학·철학·역사·사회학 등 분야별 교양을 다루는 임프린트 ‘펠리컨 북스’, 사회적·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펭귄 스페셜’ 등 시리즈도 선보여 왔다.

    90년간 숱한 위기를 통과했다. 1970년 레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브랜드가 흔들렸고, 교육 출판 회사인 피어슨그룹에 인수됐다. 2000년대 전자책 시장이 커지면서 문고판의 강점을 전자책이 흡수해버렸다. 펭귄북스는 이에 2013년 독일계 랜덤하우스와 합병하며 세계 최대 출판사 펭귄랜덤하우스로 재도약했다. 현재 영미권 출판시장 4분의 1을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외신들은 “‘온라인 공룡’이 돼버린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 대항해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펭귄랜덤하우스에서는 1년에 1억5000종 이상의 책을 판매 중이다. 전 세계 직원은 1만 명이 넘는다. 250개의 임프린트를 보유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좋은 책.’ 펭귄북스의 출발점은 펭귄랜덤하우스가 인공지능(AI) 저작권 문제에 앞장서는 이유 중 하나다. 펭귄랜덤하우스는 2024년 주요 출판사 가운데 처음으로 종이책에 “AI 훈련을 목적으로 책을 사용하거나 복제할 수 없다”고 명시하기 시작했다.

    한국 독자들에게 펭귄북스는 오래도록 ‘영어 원서 입문서’ 역할을 해 왔다. 오늘날 펭귄랜덤하우스는 한국 작가와 작품을 해외 독자에게 소개하고 있다. 2023년 펭귄 클래식 시리즈 중 하나로 한국문학 번역선집 <더 펭귄 북 오브 코리언 숏 스토리스>가 출간됐고,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일찌감치 영미권에 선보인 것도 펭귄랜덤하우스 산하 호가스 출판사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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