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는 영 무관해 보이는 일을 계속해나가는 사람이 반드시 큰마음을 품은 것은 아니다." 최근 출간된 정기현의 첫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중 첫 번째 수록작 '빅풋'은 이렇게 시작한다. 정기현이라는 사람이 출판사의 스타 편집자에서 소설가로 변신한 과정도 비슷하다.
지난 1일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 작가는 "책을 워낙 좋아해 책을 만들었고 글도 쓰게 됐다"며 "제게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했다. 그는 구독자 30만 명이 넘는 민음사 유튜브 채널 '민음사TV'를 통해 한국문학 편집자로 이름을 알렸다. 대학시절부터 소설을 써왔지만 정식으로 발표한 건 2023년부터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그가 편집자가 아닌 소설가로서 내는 첫 책이다. 정 작가는 "주변에서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됐느냐'는 질문을 새삼 받는 상황에 아직 적응 중"이라며 웃었다.
이번 소설집에는 총 8편의 소설이 실렸다. 표제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받은 소설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휴직 중인 주인공 '기은'이 동네 교회에서 시간을 떼우다가 '준영'을 만나 각자의 비밀을 나누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기은은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이 된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슬픈 사람'과 뭐가 다를까. 정 작가는 "세상에는 주위의 위로가 쏟아지는 '슬픔의 주인공'도 있지만,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면 자신조차 모르고 지나가는 슬픔이 많다"며 "그런 작은 슬픔을 소설로 쓰고 싶다"고 했다.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요 소재는 산책이다.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느껴질 정도다. 표제작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살고 있는 거여동을 산책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낸다. "김병철 들어라…"로 시작하는 의문의 낙서가 동네 곳곳에 적혀 있는 걸 보고 출처와 기원을 탐구한다.
정 작가에게 산책은 익숙한 일상을 색다르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일상에서 새로운 상상을 길어내되 담담한 관찰자의 태도를 유지한다. 소설가 임선우는 추천사에서 "정기현의 소설은 걷는 소설"이라고 했다.
정 작가는 "거여동에 6년 정도 살았었는데 동네 산책을 하면서 이상한 장면을 보면 사진으로 찍어두고 소설의 재료로 삼았다"고 했다. 소설 속 오카리나박물관, 거여고가교도 실제 거여동을 거닐며 발견한 것들이다. 그의 스마트폰 앨범에는 대문만 남긴 채 철거된 주택, 쓰레기가 천장까지 들어찬 아파트 베란다 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면이 쌓이는 중이다.

소설집에는 기은, 새미, 승주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인물들로 이어지는 연작 소설들이라고 읽으면 새로운 재미를 준다. 예컨대 '빅풋'에서 사라져버린 새미가 그 다음 순서 수록작인 '발밑의 일'에서 요정 같은 소인(小人) 새미가 돼버렸다고 상상하는 식이다. 정 작가는 "처음부터 연작을 의도한 건 아니었다"며 "책으로 묶고 나서야 연작으로 읽어낼 수 있다는 걸 깨달아 스스로도 신기했다"고 말했다.
"귀여운 것 같아요. 뭔가 엉뚱한 것 같기도 하고." 수록작 '빅풋' 속 새미를 묘사하는 말처럼 정 작가 소설의 공통적 매력은 '엉뚱함'이다. 벽시계 속 뻐꾸기와 대화를 나누고 공중에 나부끼는 포장지와도 친구가 된다. 정 작가는 "저 자신이 이상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이기 때문"이라며 "이야기 구조가 완벽하게 짜여져 있는 소설은 잘 읽고도 쉽게 잊혀지는데, 이상하고 '왜?' 묻게 만드는 소설은 계속해서 곱씹는다"고 했다.
하루 종일 '읽는 사람'인 편집자로 근무하고 퇴근 후 '쓰는 사람'으로 다시 노트북 앞에 앉을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지난달 서울국제도서전 사인회에서 독자들이 그에게 가장 많이 물어본 질문은 '글쓰기 원동력'에 대한 것이었다.
정 작가는 "책은 같은 책이어도 내용이 무궁무진해서 질렸다가도 또 새로운 책을 읽으면 그 시기를 넘길 수 있다"며 "퇴근 후 혼자 글을 쓰는 시간이 아늑하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평일에는 말 그대로 잠을 '쪼개서' 소설을 쓴다. 평일 퇴근 후 저녁을 먹고 곧장 잠에 들었다가 새벽에 깨어나면 한두 시간이라도 키보드를 또각또각 울리며 소설을 쓴다. 다시 짧게 자고 일어나 출판사로 출근한다.
"글 쓰는 일은 질리지 않는다"는 그는 문예지 '악스트(AXT)'에 장편소설을 연재하는 동시에 '이웃'에 대한 중편 소설을 집필 중이다. 이르면 올해 하반기에 출간 예정이다. 정 작가는 "웃기고 싶은 욕망을 담아 쓰고 있다"며 웃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