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년 전 동성애 코드가 불쾌하다며 관객들이 중간에 극장을 나가버렸던 문제작이 있었다. 안무가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이 작품은 시간이 흐르면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은 대표적인 현대 발레다. 영국 왕실가의 스캔들, 인물들 사이의 긴장감 등을 소재로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를 재탄생시켰는데,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1996년 영국의 권위있는 공연예술상인 올리비에상, 1999년 미국의 연극·뮤지컬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토니상을 거머쥐며 영국 런던을 대표하는 현대 예술로 자리매김했다. 초연 이후 30주년을 맞은 이 작품은 올해 세계 투어를 거쳐 지난 18일부터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한국 관객을 만나고 있다. 한국 방문은 이번이 다섯 번째다.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의 음악에 사용된 차이콥스키의 선율은 동일하다. 하지만 극적 전개는 고전 발레 작품과 차이가 있다. 재해석이라고 부르기엔 아예 다른 작품처럼 느껴질 정도. 매튜 본의 작품은 발레리나로 표현되는 가냘픈 백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영국 왕자의 유약한 심리, 그가 놓인 답답한 상황에 초점을 맞춰 보편적 인간의 고뇌를 담았다. 되고 싶은 모습을 빼닮은 백조의 환영을 본 왕자가 그 이상향을 좇다가 파멸을 맞는 이 이야기는 역동적인 춤사위와 천재적인 연출로 아름답게 그려졌다.
끝도 없이 어머니(여왕)의 애정을 갈구하지만 아들의 심약한 모습에 질린 어머니는 그의 손을 한 번도 잡아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여왕은 성 안의 숱한 남성과 유사 연애를 이어가고, 왕자는 남자들에게 질투심을 느낀다. 이는 그가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지닌 인물이란 점을 상기시킨다.
성 안에 기댈 곳 없는 왕자. 성 바깥 바(bar)에서 세상 사람과 어울려보려 하지만 망가진 왕자의 모습을 담는 파파라치의 앵글 앞에 그는 처참히 부서진다. 노숙자처럼 호숫가 벤치에 앉아 절망에 빠진 왕자가 마주한 건 15마리의 자유로운 백조들(전부 남성 무용수들). 백조를 만나자 시종일관 어두웠던 왕자의 표정은 가로수 전등이 켜지듯 점점 환해진다. 그의 움직임 역시 점차 커지고, 자유분방해진다.
왕자는 백조 중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에게 반하고 간혹 그와 2인무를 이어간다. 고전발레 속 지크프리트 왕자와 공주 백조가 추던 춤을 색다르게 해석한 것. 1막의 클라이맥스에서 깃털 바지를 입은 근육질의 백조들이 선보이는 군무 역시 악마의 저주에 걸린 비운의 백조가 아니라 왕자가 그리는 이상 속 자신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때 흐르는 차이콥스키의 음악도 기존 박자보다 빠르게 재생됐다.
2막을 통해 분위기는 반전된다. 해외 여러 나라 귀족들을 초청한 무도회가 영국 왕실에서 열리던 날, 자신이 동경한 우두머리 백조와 닮은 낯선 남자가 등장하면서 왕자의 환희는 깊은 절망으로 바뀌고 만다. 낯선 남자는 왕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여왕을 유혹한다. 왕자는 어머니의 관심을 받는 그 모습이 자신이 원하던 것임을 깨닫고 질투로 활활 타오른다.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왕자는 방아쇠를 겨누지만, 여왕을 지키려던 왕실 비서의 권총이 먼저 발사되면서 무도회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정신병원을 연상케 하는 하얀 방에 갇힌 왕자. 악몽에 시달리다가 백조의 환영을 본다. 낯선 남자의 모습을 한 백조가 힘없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그의 품에 안긴다. 그때 다른 백조 집단이 나타나 둘을 떼어 놓은 뒤 상처 입은 백조를 공격한다. 왕자는 죽음에 이르는 그 백조를 지켜보기만 한다. 공연은 백조들이 떠나간 침대 위에서 왕자가 혼절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자신이 갈망하던 모든 이상이 꺾여버린 인간의 비극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강렬한 엔딩. 수차례 커튼콜이 이어진 후에도 관객들은 여운에 휩싸여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스스로 원하는 모습이 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왕자의 심리적 혼란, 그로 인한 비애는 이 작품이 동성애라는 코드를 넘어 관객 모두를 울리게 하는 지점이었다. 무대 위 오페라를 무대로 만든 액자식 구성, 바를 재현한 무대 공간, 왕자의 방에서 순식간에 궁전 앞 공간으로 바뀌는 무대 연출 그리고 뮤지컬과 닮은 춤사위 등은 보는 재미를 더한다. 공연은 29일까지.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