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가 군과 밀착하고 있다. 오픈AI는 회사 설립 이후 처음으로 미 국방부 사업을 수주했다. 수주액은 오픈AI 연 매출의 50분의 1 수준인 2억달러(약 2700억원)에 불과하지만 파장은 컸다. 메타는 자존심을 접고 8년 전 자사가 해고한 팔머 러키에게 손을 내밀었다. 군사용 확장현실(XR) 기기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선 러키가 이끄는 방산기업 안두릴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구글은 한술 더 떴다. 올해 초 자사 인공지능(AI) 기술을 ‘군사·전쟁·핵 관련 산업·스파이 활동 등에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을 조용히 철회했다. 테크와 방산의 경계 사라진 美
과거 실리콘밸리를 지배했던 ‘기술의 윤리적 사용’에 대한 고민이 사라진 건 기업들과 미국 정부 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테크 기업들은 첨단기술 개발에 돈을 아끼지 않는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방위산업이라는 거대한 새 시장도 놓칠 수 없다. 미국 정부도 빅테크의 도움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다. 유럽에 이어 중동으로까지 전장이 확대되는 가운데 AI가 새로운 군사력 증강의 ‘핵심 버튼’이 됐기 때문이다.AI로 전쟁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공상과학(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 아니라 현실이다. 최근 이스라엘이 단 한 명의 지상군 투입 없이 AI와 드론만을 활용해 이란군 수뇌부를 제거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는 수개월 전부터 이란군 고위 지휘관들의 동선을 정밀하게 파악했다. 대상자의 행동 패턴 학습, 실시간 위치 파악, 복잡한 환경 속에서 목표물의 정확한 식별, 그리고 최종 타격에 이르는 모든 단계는 AI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문제는 AI가 핵무기처럼 소수의 국가만이 독점한 비대칭 전력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국가 간 AI 기술 격차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다. AI 패권 경쟁에 나선 미국과 중국은 AI를 국가 전략자산으로 분류하고 자국 AI 기업이 협력할 수 있는 국가를 제한하는 등 철저한 문단속에 나섰다. AI 기술에서 뒤처진다는 것은 곧 국방력 약화와 동의어가 된 지 오래다.
한국은 AI 군사화 대책 있나
일찌감치 AI가 미래 전장의 핵심이 될 것으로 본 미국은 2022년 국방부 장관 직속 최고디지털·AI책임자(CDAO)를 신설했다. 군의 AI 전략 수립을 일원화하고 민간 기업과 연계하기 위해서다. 이 자리엔 민간 기업의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도입하기 위해 실리콘밸리 출신 AI 전문가들을 앉혔다.이에 비해 한국에선 AI 군사화 전략이 여전히 담론에 그친다는 지적이 많다. ‘AI 기반 첨단 과학기술군’을 지향한다는 군은 이제야 관련 센터와 위원회를 설립하고 있다. 민간 기업이 군과 협력할 유인도 적다. 평균 10년 넘게 걸린다는 국방 획득 절차를 뚫는다고 해도 예산 대부분을 미래 전력을 위한 방위력 개선비가 아니라 전력 운영비에 쓰는 군으로부터 막대한 투자를 받는 것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금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강국이 아니라 ‘AI 후발주자’다. 정부가 ‘소버린 AI’ 육성을 핵심 전략으로 내세운 만큼 이제라도 AI를 핵심 군 자산으로 바라봐야 한다. 20세기 대표 비대칭 전력(핵무기)을 확보하지 못한 데 이어 21세기 대표 비대칭 전력까지 갖추지 못하면 국가 존립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