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손보험을 악용하는 일부 가입자와 병원이 국민건강보험 재정도 악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의료비 증가율이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중 1위(2016~2021년 기준)를 기록한 가운데 비급여 의료행위에 수반된 혼합진료 등의 건강보험 추가 청구액이 연간 최대 1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됐다. 민간 보험사들 역시 보험사기와 편법 의료비 청구로 인해 손실을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간 보험사와 건강보험 공단의 정보가 단절된 탓으로 분석된다.
실손 물리치료·백내장 진료에 건강보험도 7210억 지출
감사원은 14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건강·실손·자동차 보험 등 보험서비스 이용실태' 감사 결과를 공개했다. 1~4세대 실손보험의 손해율이 모두 100%를 웃돌고, 자동차 보험 의료비도 급증하는 등 민간 보험이 의료비 폭증의 주요 요인으로 지적되자 지난해 관련 정책 감사에 착수했다. 감사원은 분석을 통해 일부 보험 가입자 집단과 병·의원에 보험금 지급이 집중되는 등의 문제점을 발견, 보건복지부 장관 금융위원장 등에게 관련 제도를 개선할 것을 통보했다.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의 경우 물리치료·백내장 등 상위 9개 비급여 항목에서 연간 3조5201억원의 총 진료비가 추가로 발생했고, 이와 연계한 진찰료와 혼합진료 등으로 건강보험이 7210억원을 추가 부담한 것으로 나타났다. 감사원이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등을 통해 38개 보험사들의 청구·지급 데이터 등 확보해 분석한 결과다.
전체 실손보험 의료비 현황을 살펴보면 가입자 중 약 40%만 보험금을 청구했고, 이들이 건강보험 지급액도 증가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감사원 이들이 실손보험 비가입자와 비슷한 수준으로만 의료 서비스를 이용했다면 건강보험이 연간 3조8300억∼10조9200억원을 덜 지출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감사원과 건강보험공단이 2018~2022년 실손보험 청구 3억1300만건과 건강보험 청구 4억7600만건을 분석한 결과다. 정밀 추정을 위해 연령·소득 등을 기준으로 동일 집단 비교 방식으로 수치를 보정했다. 실손보험 비가입자 집단에 비해 가입자 집단에 건강보험 재정이 연간 3조8300억원 더 지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보험 가입자 중 실제 실손보험금을 청구한 집단과 건강보험만 청구한 집단(실손보험 가입했으나 미청구자 포함)을 비교했을 때는 연간 10조9200억원의 격차가 났다.
악명 높은 보험사기 뚜렷하게 드러나
일부 계약자와 병·의원의 부적절한 실손 보험금 청구 때문에 민간 보험사와 전체 가입자의 부담이 가중되는 모습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실손 보험금을 편법 청구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동일 진료에 대한 건강보험과 실손보험 청구서 1억1000만건을 비교해 보니 진단명(상병 코드)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31.9%에 달했고, 상병 코드가 부분적으로 불일치하는 비율도 14.5%였다. 실손보험에서 보장하는 항목과 비슷한 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보험금 청구를 위해 편법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궁근종 치료를 위한 고강도 초음파(HIFU) 시술과 유아 발달지연 치료 등이 대표이었다.병원이 건강보험에 청구한 질병 코드가 보험 가입시 사전 고지해야하는 10대 질환인 반면, 민간 보험사에 다른 병명의 진단서로 보험금을 청구한 사례도 154만건에 달했다. 보험사에 사전 고지해야하는 10대 질환을 사전에 알리지 않았지만 보험금을 타려고 거짓 청구한 것으로 의료 전문가들은 추정했다.
전형적 보험사기가 의심되는 사례도 상당수 적발됐다. 지난 5년간 실손보험만 청구하고 건강보험은 청구하지 않은 진료 건수가 730만건에 달했다. 일부 성형외과가 비염으로 진단해 실손보험을 청구한 뒤 실제로는 코 성형수술을 하거나, 근골격계 질환으로 진단한 뒤 피부미용 시술을 하는 식이다. 감사원 보고서에 따르면 보험사기가 적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병원이 건강보험금을 청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정했다.
감사원은 이 같은 문제점의 근본 원인으로 건강보험과 민간 보험사들의 정보 교류가 막혀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자동차 보험의 경우에도 보험사가 사고 피해자에 장래 치료비를 지급한 후 이를 건강보험공단에 공유하지 않아 공단이 지급할 필요 없는 급여를 계속 지급한 사례 37만건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단이 본인부담금 상한액 초과금을 환급해 주는데도 실손보험금이 이중으로 지급되는 경우도 문제로 지적됐다.
감사원은 이 같은 결론을 바탕으로 관계 부처에 건강보험과 실손보험 간 정보를 연계하고, 민간 보험사가 보험사고 정보를 건강보험 공단에 의무 제출하는 등의 법적 근거를 마련할 것을 통보했다. 이와 별개로 금융위와 금감원 역시 중증 질환 보장을 강화하는 대신 비중증·비급여 진료는 가입자 부담을 확대하는 ‘실손보험 개혁 방안’을 지난달 내놨다. 다만 의료비 과다 지출을 막는 것은 정치권의 의지가 변수가 될 전망이다. 민간 보험사와 건강보험 공단의 정보 공유는 오래전부터 논의됐으나, 의료 단체의 격렬한 반대 등으로 입법이 좌절됐다.
이현일/서형교 기자 hiuneal@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