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욱 여주대 총장은 농협 내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다.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돈이 없어 농협대에 갔고, 졸업 후 곧장 농협에 입사했다. 하나로마트 점장부터 고양유통센터 사장까지, 소매와 도매를 아우르는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농협중앙회 농업경제부문 대표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쯤이면 목표를 모두 이룬 듯하지만 마음 한구석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 있었다. 학업이었다. 회사를 다니며 새벽잠을 쪼개 석·박사 학위를 따고, 9개 전문가 과정을 섭렵한 배경이다. ‘40년 농협맨’이던 그는 지난 1일 제12대 여주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2022년 농협대 총장을 지낸 데 이어 두 번째 총장직이다. 최근 한국경제신문 본사에서 이 총장을 만났다.
▷농협대에 입학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원래 꿈은 소설가였어요. 국문과나 철학과에 가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등록금이 없는 학교를 찾았어요. 육군사관학교나 한국철도대, 농협대가 그런 학교였죠. 졸업하면 농협중앙회에 취직할 수 있으니 밥 벌어먹고 살기는 괜찮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은 어땠습니까.
“생활기록부에 ‘집념이 강한 어린이’라고 적혔는데, 돌이켜보면 어떤 일을 해보겠다고 하면 반드시 이뤄냈던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순천고가 아니면 고등학교를 보내주지 않겠다고 해서 중졸을 면하고자 노력했어요. 776번. 그때 입학 번호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2년제 대학이어서 아쉽지 않았나요.
“그래도 시골에서는 난다 긴다 했는데, 학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결핍이 생기더군요. 대리가 돼 광주로 발령이 났을 때 광주대 행정학과에 편입했습니다. 서울 농협중앙회 총무부에 근무할 때는 서강대 경제대학원에 들어갔어요. 토요일마다 조교를 찾아가 통계학을 배웠습니다.”
▷일과 학업의 병행이 어렵지 않았나요.
“허리디스크가 왔어요. 침대에 누워서 논문을 쓰는데 나 자신이 스티븐 호킹 박사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남준우 서강대 교수에게 16번이나 퇴짜를 맞았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논문이 통과됐다고 생각했는데, 학위 수여식에서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르더군요. 최우수논문상 수상자라고요.”
▷그러다 박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위대한 학자가 되겠다는 거창한 뜻은 없었습니다. 파주하나로클럽 점장으로 있을 때 당시 김성훈 중앙대 부총장(전 농림부 장관)이 박사 학위를 받아 보라고 권하더군요. 1주일에 세 번씩 오후 6시에 택시를 타고 달려가 수업을 들었어요.”
▷논문 주제는 무엇이었나요.
“2003년 파주하나로클럽 점장 시절 협력업체 126곳 사장님들을 구내식당으로 초대해 불고기와 상추쌈을 대접했어요. 유통업체가 ‘갑질’을 하는 게 아니라 고충을 듣겠다고요. 이런 경험을 토대로 유통기업으로서 윤리경영을 하니 협력업체는 물론 직원과 고객들도 더 만족하고 몰입하더라는 실증 분석을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20년 전에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효과를 분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본업’은 어떻게 해나갔습니까.
“1996년 농협유통 상록점 점장으로 발령이 났어요. 서울 역삼동 테헤란로에 있는 매장이었는데, 국가정보원 간부나 전·현직 관료가 많이 오는 곳이었어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양복을 빼입고 서서 90도로 인사했어요. 마트 점장이 양복이라니, 처음에는 이상하게 쳐다보다가도 나중엔 인사를 하더군요. 그때 유통업도 결국은 신뢰에서 시작된다는 걸 처음 배웠습니다.”
▷현장에선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요.
“유통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사는 일’입니다. 점장 시절, 매장에서 닭튀김을 파는데 기름값을 아끼려 어제 쓴 기름을 다시 쓰려고 하더군요. 그때 제가 물었습니다. 당신 손자가 먹는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 있겠느냐고요. 농협하나로마트에 가면 ‘진심을 판다, 안심을 산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제가 농협중앙회 농업경제부문 대표를 지낼 때 만든 슬로건입니다. 이것이 결국 유통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유통시장 최저가 경쟁에는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2013년 농협중앙회 농업경제대표에 취임한 뒤 일성이 “협력업체 납품대금 지급 기일을 단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40일이던 협력업체 납품대금 지급기일을 5일로 단축했고, 현금을 받은 협력업체들은 납품 가격을 깎아줬습니다. 농협은 원가를 낮추고, 이는 곧 소비자 혜택으로 돌아갔죠.”
▷농협 근무 기간의 절반을 조직의 장(長)으로 지냈습니다.
“리더의 자질은 결국 성심으로 사람을 관리하는 것이더군요. 2007년 하나로마트 고양유통센터장 시절 농협 직원은 물론 협력업체 직원까지 총 1200명을 챙겼습니다. 상을 당한 직원에게는 가장 좋은 제수를 보내고, 직원 자녀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있으면 찹쌀떡을 보냈습니다.”
▷열심히 살아온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저는 원가의식이 투철한 사람입니다. ‘프리라이더’로 사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더라고요. 고용 계약서를 쓸 때마다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 스스로 ‘몸값’을 못 한다고 판단하면 그만두겠다고요.”
▷여주대 총장으로서 목표는 무엇입니까.
“기술은 현장에서 6개월이면 배울 수 있습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전문기술인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사람됨을 배울 수 있는 곳은 학교밖에 없으니까요.”
▷지역사회에서 대학이 맡는 역할도 중요한데요.
“여주대는 우오현 SM그룹 회장이 2022년 인수한 학교입니다. 우오현 이사장도 3만원이 없어서 대학을 못 갔다고 하더군요. 배움에 대한 ‘한’이 있는 겁니다. 실무에 강한 인재를 양성하고, 지역 사회와 함께하는 대학을 만들어 달라는 게 우 이사장의 요청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인근 지역에 돈이 없어 공부하지 못한 만학도가 많습니다. 석학들을 초청해 지역사회 주민들도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이분들을 위한 교육 과정을 개설해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젊은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유통업체에서 일하며 깨달은 게 있습니다. 뭐든지 지속가능하려면 결국 상품이 좋아야 한다고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상품성에는 5%만 공을 들이고 인간관계로 95%를 채우려 합니다. 이런 상품은 처음엔 운이 좋아 납품에 성공하더라도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흙수저’로 태어났다고 실망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실력과 능력을 채우세요. 95%의 상품성을 갖춘 사람이 된다면 결국에는 그 상품이 선택받는다고, 경험을 통해 확신합니다.”
고재연 기자
■ 약력
△1958년 출생
△전남 순천고
△농협대 졸업
△서강대 경제학 석사
△중앙대 경제학 박사
△농협중앙회 입사
△농협중앙회 농업경제부문 대표이사
△농민신문사 대표
△농협대 총장
△인간개발연구원(HDI) 원장
△여주대 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