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기본법 4년이나 뭉개더니…”

세계 AI 무대에서 한국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는 우려는 작년부터 나왔다. 영국에서 처음 열린 2023년 AI 정상회의만 해도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올트먼 CEO, 브래드 스미스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 등 주요 빅테크 수장이 참석했다. AI업계 관계자는 “한국은 2020년 발의된 AI 기본법을 4년간 방치하다가 작년 말에야 통과시켰다”며 “허송세월하는 사이 한국이 글로벌 AI 시장에서 잊히고 있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국내 상황은 혼란 일색이다. 12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이후 발의됐거나 발의될 예정인 AI 관련 법안만 5개다. AI 투자 촉진법(김건 국민의힘 의원), 한국형 AI 육성법(정일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과 더불어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각각 딥시크 금지법, AI 인재 병역 특례법을 논의 중이다.
지자체도 앞다퉈 정책을 내놓고 있다. 서울시는 전날 ‘AI 서울 비전’을 발표하며 서울을 글로벌 3대 허브로 키우겠다고 공언했다. 김동연 경기지사는 성남시 판교에 있는 AI 스타트업을 잇달아 방문해 ‘AI 정책 주도권’ 경쟁에 가세했다.
AI 행사가 봇물 터지듯 열려 기업 AI 전문가들이 ‘간담회 뺑뺑이’를 도느라 본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일도 벌어진다. AI업계 관계자는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뒤늦게 보여주기식으로 하는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벌써 부처별 AI ‘칸막이’
장기적 비전 없이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단기 대책이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각 정부 부처가 중소기업 AI 활용 촉진법(중소벤처기업부), AI 이용자 보호법(방송통신위원회), AI 산업 활용 촉진법(산업통상자원부) 등 별도의 AI 법안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저작권, 개인정보보호위는 개인정보 활용 영역에서 AI 관련 가이드라인을 준비하고 있다.경쟁적 입법과 정책 결정으로 산업 현장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한 생성형 AI 스타트업 관계자는 “큰 방향이 없는 상황에서 각개전투로 개별 대책을 내놔 사업 결정을 하기 어렵다”고 했다. 벌써 부처별 칸막이가 쳐져 특정 데이터를 활용해 AI 서비스를 개발했다가 뒤늦게 규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AI산업 기초가 되는 데이터 관련 법만 해도 특허청, 산업부, 과기정통부가 모두 데이터 관할권을 주장하며 부정경쟁방지법, 산업디지털전환촉진법, 데이터기본법 등을 쏟아내 중복 입법 문제가 불거졌다. 데이터 보호엔 부정경쟁방지법, 데이터 활용엔 저작권법을 적용하는 등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할 국가AI위원회는 출범 반년이 지나도록 홈페이지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국회 예산안 제출 마감 이후에 발족해 예산안에 반영하지도 못했다.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관련 예산 증액을 요구했지만 불발됐다. 최근에야 예비비로 겨우 일부 운영 예산을 확보했다. AI업계 관계자는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중국이 빠르게 전진하는 사이에 한국만 정부, 기업, 지자체, 대학 등 각 주체가 중구난방으로 혼란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