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민간에서 ‘사무라이 반도체’ 부활의 선봉에 섰다면 일본 정부는 자금 지원과 정책으로 후방을 받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반도체 제조 공정에 쏠린 생태계를 설계로 확장해 미국 중국 대만 한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시장에서 반전을 모색하려는 것이 일본의 전략이다.
6일 인공지능(AI)업계와 외교가에 따르면 일본 경제산업성은 최근 2024회계연도(2024년 4월~2025년 3월) 추가경정예산과 2025회계연도(2025년 4월~2026년 3월) 예산으로 반도체 지원금 1600억엔(약 1조5200억원)을 확보했다. AI 반도체 설계 연구개발(R&D)에 쓰일 예정이다.일본 정부는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반도체산업을 지원했지만 대부분 제조 기반 확보에 집중했다.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업인 대만 TSMC를 구마모토에 유치하고, 키옥시아 등 일본 8개 기업이 합작해 세운 라피더스 등의 공장 건설에 약 3조엔을 출자했다. 최근 AI 붐을 탄 미국 엔비디아 가 그래픽처리장치(GPU)로 기업가치(시가총액)를 세계 1위로 끌어올리고, 애플이 자체 설계한 반도체로 아이폰 성능을 혁신적으로 개선하는 등 설계 역량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전략 수정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부는 설계 인재 육성을 위해 연내 7개 거점 대학을 선정해 연간 1억엔(약 9억3000만원)가량을 지원하고, 전문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했다. 미국 최첨단 설계 기업 텐스트렌트와 연계한 실무 교육도 제공하는 등 외부 협력도 확대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국가가 산업 부문을 위해 육성 강좌를 개설하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경제산업성은 지난해 말 각의(국무회의)에서 2030년까지 반도체와 AI 분야에 10조엔 이상의 공적자금을 투입한다는 장기 계획도 세웠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경제안보 관점에서 설계부터 제조까지 완결된 반도체 생태계를 자국 내에 구축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1980년대까지 세계 반도체산업을 호령한 일본은 한국 대만 등에 1등 자리를 내줬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세계 반도체 설계 시장에서 일본의 점유율은 9%에 불과하다. 특히 설계에 사용되는 반도체전자설계자동화(EDA) 도구 부문에서는 점유율이 ‘0’에 가깝다.
반도체 분야 엔지니어 인력도 급감했다. 경제산업성 공업통계조사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반도체 산업(소자·집적회로·제조장비) 종사자는 약 16만 명으로 20년 만에 30%가량 줄었다. 하지만 일본의 민관 ‘원팀’ 행보에 희망이 싹트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Arm 없이는 스타게이트도 돈 먹는 하마가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며 “손 회장이 주도하는 스타게이트를 계기로 일본 반도체산업이 부활의 신호탄을 쏠 것”이라고 관측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