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 요즘으로 치면 일진인 양아치 하나가 어느 반에 찾아가 약한 학생 하나를 폭행했다. 삼일째 지속되자, 공부만 하던 그 학급 반장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야! 우리 반 친구가 저렇게 당하는데 가만있을 거냐!” 그러고는 당황한 양아치를 넘어뜨렸다. 양아치는 반격할 수 없었다. 그때까진 모른 척하던 학생들이 전부 달려들어 발로 차고 밟아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그 반에는 감히 양아치들이 얼씬거리지 못했다. 전교생이 부러워했다. 그 학급 아이들의 눈동자에는 사랑과 자존감이 있었다.
나는 항일독립투사였던 내 외조부의 첫 손자다. 내 삼십년 벗조차 내가 독립유공자 후손임을 몰랐다. 내가 말하고 다니지 않아서였다. 항일학생 비밀결사를 이끌었고, 만주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된 뒤 국내로 압송돼 긴 옥고를 치르며 고문당한 이는 그분이지 내가 아니잖은가. 침묵 속에 간직할 뿐이었다. ‘19’로 시작하는 내 독립유공자후손 보훈번호도 최근에 무슨 서류 때문에 난생처음 국가보훈부에 전화를 걸었다가 알게 된 거였다. 그러던 내가 ‘일부러’ 이런 발언들을 하게 된 것은 지난 정권이 ‘토착왜구’라는 ‘나치(Nazi) 용어’로 국민들을 갈라치기해 정치적 탐욕을 챙기면서부터다.
더 황당한 건, 그러는 국회의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찐’ 친일파의 후손들이라는 점이었다. 개중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손자도 있었다. 그런 자들이 예컨대 일식집에서 밥을 먹었다는 죄목을 들어 항일독립투사의 장손자(長孫子)인 나를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실성한 나라에 나는 살고 있었다. 그럼, 중식집에서 짜장면 먹으면 ‘토착짱개’인 거냐? 뒤에서는 일본 미국 안 가리고 자신에게나 제 자식에게나 좋은 거면 불법도 무릅쓰고 환장을 하는 작자들이 이런 더러운 무리수를 일삼는 까닭은 ‘반미(反美) 마약장사’가 대중에게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자, 반미에서 ‘반일(反日)’로 브랜드명을 교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저들에게 친일파 후손이니까 국회의원을 사퇴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자유인으로서 다른 개인에게 그 어떤 연좌제도 들이대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윤석열이 베이징대에서 ‘중국은 높고 큰 산이요 한국은 작은 산봉우리. 한국도 중국몽(中國夢)에 따를 것’이라고 연설했다면 탄핵 정도가 아니라 여적죄(與敵罪)에 처해졌을 것이고, 만약 도쿄대에 가서 일본에 저런 식의 칭송과 굴종을 바쳤다면 아예 귀국조차 영원히 못해 ‘웃프게도’ 처벌이 안 됐을 것이다. 파리가 말 엉덩이에 붙어가듯이 한국은 중국에 딱 붙어가야 한다고 중국 베이징 방문 때 말씀하셨던 전 서울시장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이중(二重)의 이중잣대’는 대체 어떤 정신병에 의해 작동되는 것일까? ‘미국은 백년 원수, 중국은 천년 원수’라고 가르치는 ‘반중(反中) 극우’ 독재자 김정은과 김씨왕실(金氏王室)의 외교 감각이 차라리 건강하다.
한반도의 대사건은 국제 문제가 아니었던 적이 없고 우리에게는 원수가 아니었던 주변국이 없으며 시진핑은 트럼프에게 남북한은 원래 중국의 속국(屬國)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원래’가 언제 지워져 그의 저 문장이 그가 원하는 대로 완성될지는 미지수지만,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은 일본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자고 서재필과 독립협회가 세운 것이다. 중국이 ‘초한전(超限戰)’을 전 세계에 실행하고 있는 것은 중국 스스로 ‘선전하는 비밀’이다.
방점은 일본이나 중국이 아니라, ‘매국노’에 찍혀야 한다. 나라는 누구나 팔아먹을 수 있고 방법도 다양하다. 고려 때 몽골에 침략당했다고 해서 현재의 몽골을 증오하는 건 ‘병맛’이니, 일본이든 중국이든 러시아든 적일 때는 적으로, 친구일 때는 친구로 대하면 된다. 또한 어설픈 중립이 적을 친구로 착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 한반도다. ‘매국노 바르게 찾기’의 정답은 시대마다 다를 수 있되 그 기준은 동일하다. 대한민국의 안위와 이익을 위한 정확한 현실 판단이 그것이다. 격동하는 한국 정치의 광장에 몰려다니는 중국인들이 일본인이라면 용서하겠는가? 주권 강탈이 전쟁에 의해 수행되는 것은 옛 모델이다. 요즘은 슬금슬금 정교하게 한 나라의 뼈와 살을 ‘침식’한다. 어릴 적 그 반장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가만있을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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