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들이 옷을 사갔다가도 다음날이면 반품해달라며 가지고 와요. 날씨가 추워졌다가 따뜻해졌다가 오락가락 하잖아요. 잠깐 한파가 오면 사갔다가 날씨 풀려서 괜찮겠다 싶으면 도로 가져오는 거죠.”
지난 7일 서울 중구의 한 백화점 여성 의류 매장 점원 김모 씨는 “옷 장사 한 지 20년이 다됐지만 이번 겨울만큼 장사하기 힘든 해는 없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매장은 예년에 비해 춥지 않았던 지난해 11~12월 겨울 매출이 전년(2023년) 동기 대비 딱 반토막 났다고 했다.
인근의 명동 옷가게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한 캐주얼 의류 전문점은 이날 오후 매장을 찾은 고객이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10여명 가까이 돼 보이는 점원들만 우두커니 손님을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작년보다 할인 품목을 늘리고 할인율도 50%까지 올렸지만 매출은 도리어 크게 줄었다.
평일 오후 시간대임을 감안해도 이처럼 손님을 아예 끌지 못하는 의류 점포도 여럿이었다. 한 의류 매장 직원 이모 씨는 “어쩌다 매장에 들어오는 손님들도 구경만 하다가 나간다. 그나마 지갑을 여는 고객도 대부분 장갑, 목도리 같이 단가가 낮은 잡화 정도만 사가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4분기 옷 장사 공쳤다"
패션업계의 불황이 깊어지고 있다. 고물가·고금리에 따른 내수 부진이 연말 연초까지 이어지면서다. 올 겨울엔 날씨마저 받쳐주지 않았다. 통상 의류 업체들의 한 해 장사는 겨울이 추워야 잘 된다. 코트, 패딩 같이 고가 의류 매출이 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11월부터 비교적 온난한 날씨를 보이면서 소위 ‘옷 장사를 공쳤다’는 얘기가 나온다.8일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가구당 월평균 소비지출(290만7000원) 중 의류·신발 지출은 1년 전보다 1.6% 감소한 11만4000원으로 집계됐다. 소비지출에서 의류·신발이 차지하는 비율은 3.9%에 불과, 분기별 통계가 발표되기 시작한 2019년 이래 가장 낮다. 의류·신발 비중은 직전 분기 5.4%에서 3%대까지 떨어졌다.
패션업체들은 고물가에 따른 소비 침체에 긴 폭염까지 겹치면서 가을까지 옷을 많이 못 팔았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지난해 3분기 영업이익은 21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6%나 줄었다. 신세계인터내셔날도 3분기 영업익이 전년 동기보다 65% 급감한 21억원에 그쳤다.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은 영업손실 149억원으로 적자폭이 확대됐다. 산업활동동향 소매판매 통계에서도 의복 판매액은 2023년 12월(-0.7%)부터 지난해 10월(-2.7%)까지 11개월째 ‘마이너스’ 행진 중이다.
겨울철 실적 반등만 기다렸지만 겨울 의류도 기대만큼 팔리지 않았다. 기상청에 따르면 2023년에는 11월 들어 최저기온이 영하로 내려간 날이 11일이었던 반면 지난해 11월엔 단 하루 뿐이었다. 최고기온이 10도 이상인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다. 11월 초까지는 반팔을 입는 이들도 많았을 정도다. 12월에도 추웠다가 금세 기온이 풀리는 등 날씨가 오락가락했다.
통상 동계시즌 의류 매출은 신제품을 출시하는 9월부터 나오기 시작해 겨울 초입인 11월에 최고치를 찍는다. 11월이 춥지 않으면 겨울 매출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시즌 오프'에 들어가는 12월부터는 옷을 팔아도 남는 게 거의 없다. 세일 시즌부터 30% 이상 할인을 하는데, 이 경우 백화점 기준 수수료 등을 떼고 나면 마진은 없거나 마이너스 수준이다. 12월부터는 재고털이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한 의류업체 임원은 “사실상 11월 장사가 안되면 4분기 실적도 곤두박질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날 명동 영플라자 한 제조·직매형 의류(SPA) 매장에서 만난 40대 주부 이모 씨도 올해 겨울 날씨가 비교적 따뜻해 패딩이나 코트를 안 샀다고 했다. 이 씨는 “초겨울까진 덥다고 느껴질 날씨가 이어져 아우터를 사지 않았다. 간혹 추워질 땐 핫팩을 붙이거나 발열내의 같은 걸 속에 껴입어 버틴다”고 말했다.
재고도 쌓인다
설상가상 재고 처리에도 어려움을 겪는 분위기다. 12월로 접어들자마자 계엄과 탄핵으로 사회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막판엔 무안 제주항공 참사까지 터져 연말 특수는 아예 포기했다. 무신사, 이랜드 등 패션업체들이 연초부터 ‘패딩 충전재 허위 표기’ 논란을 일으킨 것도 의류 소비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시장 침체 속 옷 재고는 계속 쌓이는 중이다.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2024년 3분기 기준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의류를 포함한 재고자산은 3414억원으로 재작년 3분기 3376억원보다 38억원 증가했다. 같은 기간 한섬의 재고자산은 6585억원으로 전년 6521억원보다 64억원 늘었다. 전년 동기 대비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LF는 4467억원, F&F는 3617억원을 기록했다.
패션업계는 재고가 증가하는 데 특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 유행에 민감한 의류 특성상 한 철만 지나도 판매가 어려워 자산 가치가 빠르게 하락하는 탓이다. 정상 판매가에 안 팔려 할인하는 의류가 많아지면 다음해 업황에도 영향을 미친다. 소비자들이 신제품보다 할인 품목에 눈을 돌리기 때문. 연초 겨울 재고를 일정 부분 털어내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다음 겨울 매출까지 부진이 이어진다는 얘기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겨울 재고를 효율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면 패션시장 침체가 수년간 이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2014년 시작된 아웃도어 몰락기를 떠올려보면 된다. 당시에도 11월까지 따뜻한 기온이 이어지면서 창고에 쌓인 겨울 재고를 이듬해 여름, 가을까지 매장에서 함께 판매했다”며 “당연히 소비자들은 값이 저렴한 재고 제품에만 지갑을 열었다. 결국 아웃도어 업체들이 줄줄이 겨울 장사를 공치면서 패션 시장 부진이 장기화됐다”고 덧붙였다.
유통 회사들은 재고 처리에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현대백화점은 의류 판매에 날씨 영향을 덜 받도록 시즌 구분을 재정립하겠다며 TF(태스크포스)까지 꾸렸다. 기존의 사계절 구분에서 벗어나 유연하게 시즌 기준을 설정하고 선제적으로 판매 전략을 수립하겠다는 것이다. 재고를 판매하는 오프프라이스 형태 매장도 확대하는 양상. 신세계백화점은 아웃렛처럼 자사 백화점에서 안 팔린 재고뿐 아니라 외부 브랜드의 재고 의류까지 직매입해 30~80%가량 낮은 가격에 파는 ‘팩토리스토어’를 운영하는데, 작년 한 해 거래액이 1000억원을 넘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