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상반기 갚아야 할 국내 기업의 회사채 물량이 역대 최대인 50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신용스프레드(회사채와 국고채의 금리 격차)가 최근 10개월 새 가장 크게 벌어지는 등 연말에 접어들며 자금 조달 여건이 빠르게 악화하고 있다. 신용도가 낮은 일반 기업은 회사채 상환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25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내년 상반기 만기를 맞는 회사채는 49조8212억원어치에 이른다. 분기별로 보면 내년 1분기 26조6175억원, 2분기 23조2037억원어치의 만기가 도래한다. 기업들은 대체로 만기 회사채가 돌아오면 새로운 회사채를 찍는 차환 발행으로 이를 갚는다. 하지만 회사채 투자심리가 빠르게 위축되는 게 문제다. 지난 24일 AA-등급 회사채(3년 만기 기준)의 신용스프레드는 0.682%포인트였다. 2월 21일(0.688%포인트) 후 가장 크다. 지난달 0.5%포인트대로 줄어들었지만 이달 들어 계엄 사태 등이 불거지며 다시 벌어졌다. 신용스프레드는 회사채 금리에서 국고채 금리를 뺀 수치다. 채권 금리는 가격과 반대로 움직인다. 신용스프레드가 커졌다는 것은 사람들이 회사채 투자를 꺼려 국고채 대비 회사채 가격이 더 하락했다는 뜻이다.
석유화학, 2차전지 등 국내 주력 기업의 신용도가 줄강등되는 가운데 우량 등급의 공사채 발행이 가파르게 늘어난 점도 회사채 투자심리가 위축된 이유다. 수요가 줄자 회사채 금리는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24일 AA-등급 회사채 금리는 연 3.308%로 전날보다 0.016%포인트 올랐다. 그만큼 기업의 자금 부담이 커졌다. 내년 초 차환 발행 물량이 몰리는데도 투자자를 찾지 못하는 이른바 ‘미매각 사태’가 빈번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차환 리스크 커진 대기업…신용스프레드 10개월來 최대폭
계엄사태로 기관 투심 위축되고 석유화학업체 신용리스크 불거져
내년 상반기 기업들이 갚아야 할 회사채가 50조원어치에 육박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정치 혼란으로 회사채 투자 심리가 위축된 데 이어 석유화학업계 신용 우려가 확산하고, 특수채가 시중 유동성을 흡수하는 등 기업들의 자금 조달 환경은 악화 일로에 있다. 중소기업은 물론 일부 대기업까지 차환 발행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계엄사태로 기관 투심 위축되고 석유화학업체 신용리스크 불거져
○ 기업들 ‘역대급 빚’ 갚아야
25일 금융투자협회와 코스콤 체크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의 회사채 만기 도래 물량은 내년 1분기 26조6175억원, 2분기 23조2037억원어치에 이른다. 반기 기준 49조8212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이를 갚기 위해 매달 8조~9조원씩 조달해야 하는 셈이다.그룹별로 보면 SK의 내년 상반기 차환 물량이 6조2516억원어치로 가장 많다. 이어 롯데(4조2740억원), LG(3조1770억원) 순이다. 삼성(2조7500억원), 중흥건설(2조2600억원), 한화(1조5500억원), GS(1조4500억원)도 차환 물량이 ‘조(兆) 단위’에 이른다.
이들 차환 물량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조달금리가 올라가거나 미매각 사태가 터질 것이라는 우려가 번지고 있다. 기업들의 자금 조달 여건이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어서다. 지난 24일 AA-등급 회사채 신용스프레드(국고채와의 금리 차이)는 0.682%포인트로 올해 2월 21일(0.688%포인트)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벌어졌다. 회사채 신용스프레드가 커진다는 것은 국고채 대비 회사채의 인기가 그만큼 떨어진다는 의미다. 찾는 사람이 줄어드니 금리는 오를 수밖에 없다.
24일 AA-등급(무보증·3년 만기 기준) 회사채 금리는 0.016%포인트 오른 연 3.308%로 집계됐다. 지난달 27일(연 3.316%) 이후 가장 높았다. BBB-등급 회사채 금리도 0.016%포인트 상승한 연 9.077%로 지난달 27일(연 9.122%)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 롯데케미칼·여천NCC 신용리스크
자금시장이 얼어붙은 것은 계엄 사태에 따른 일련의 정치 혼란으로 불확실성이 커진 점과 맞물린다. 여기에 롯데케미칼과 여천NCC 등 석유화학업체의 신용 리스크가 불거진 점도 자금시장에 직격탄으로 작용했다. 한국기업평가 등은 이달 11일 여천NCC의 회사채 신용등급을 ‘A(부정적)’에서 ‘A-(부정적)’로 하향 조정했다. 신용등급 하향으로 여천NCC가 발행한 7050억원 규모 회사채의 조기 상환 우려가 번졌다. 이 회사가 발행한 회사채 700억원어치에는 ‘기업 신용등급이 ‘BBB+’ 이하로 강등될 경우 조기 상환될 수 있다’는 조건이 담겨 있다. 이 같은 조건에 따라 여천NCC는 등급이 한 번 더 떨어지면 7050억원어치 회사채를 모두 조기 상환해야 한다. 앞서 롯데케미칼도 회사채 2조450억원어치의 조기 상환 우려가 불거졌다.2차전지·증권·신탁 업종의 신용등급 전망이 흔들리는 것도 우려되는 변수다. 이달 2차전지 소재업체인 에코프로·에코프로비엠 신용등급 전망은 기존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됐다.
신용등급 AAA급 공사채(특수채)가 쏟아지는 것도 회사채 시장을 위축시킬 변수로 꼽힌다. 시장 유동성을 이들 특수채가 빨아들일 수 있어서다. 내년 상반기에 만기가 도래하는 특수채는 51조7988억원어치로 나타났다. 반기 물량 기준 역대 최대다. 만기 도래 특수채 가운데 한전채가 11조9000억원어치로 비중이 가장 크다. 여기에 LH(한국토지주택공사),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한국주택금융공사 등의 채권 순발행액도 급증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내년 공공주택 공급 확대와 정책금융 증가 등으로 관련 자금 조달 유인이 커졌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고민은 깊어졌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매년 초 기관의 투자금 집행이 몰리는 이른바 ‘연초 효과’를 노리겠다는 게 기업들의 구상이다. 포스코가 이 같은 연초 효과를 노리고 내년 회사채 시장의 첫 주자로 나선다. 5000억원 조달이 목표다. LG화학도 다음달 회사채 3000억원어치를 발행한다.
자금시장 분위기가 나빠지자 40조원 규모에 달하는 채권·단기자금시장 안정프로그램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이 높다. 김은기 삼성증권 수석연구위원은 “정부는 정책적 대응으로 회사채 시장의 불안감을 해소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익환/장현주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