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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택한 '죽음'이란 거짓말…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방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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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침바다 갈매기는’ 제목을 되뇌며 생각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어디로 날아가더라. 희망에 찬 아침 바다를 노 저어 가는 반복 후렴만 또렷하게 떠오르고 중간의 가사들은 머릿속에서 아주 사라져 버렸다. 어린 시절 동요는 이제 오래된 멜로디만 남았다.

수수께끼를 푸는 기분으로 가사에 쓰였을 법한 구절과 단어들을 상상했다. 동요는 분명 희망, 행복 같은 단어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작은 어촌 마을의 일상을 동요로 배울 테니까. 파랗게 출렁이는 바다, 등고선처럼 표시된 파도, 작은 고깃배, 어부들은 함박웃음으로 물고기 가득한 그물을 끌어 올리고 하늘에는 갈매기가 날 것이다.

그러나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어린 날 상상한 그 항구로 향하지 않는다. 대신 도착한 곳은 ‘그래도 죽을 수는 없는’ 사람들이 고여 있는 곳, ‘제정신이면 떠나야 하는 곳’이다.

뱃전에 앉아 있는 용수(박종환)는 무력하다. 남루한 미래를 상상해서 그럴 것이다. 그의 베트남 출신 아내는 임신했는데, 아이를 낳으면 이 마을에서 어떻게 키울지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의 미래에는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그의 인생은 이미 망한 것 같다. 생각은 자꾸 같은 지점에서 막힌다. 결국 문제는 돈이다. 돈만 해결되면, 그러면 모든 것이 풀릴 것 같다. 그래서 그가 사라지고 실종·사망 보험금이 나오면 그것이 가족에게 ‘선물’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용수는 놓친 게 많다. 아들을 잃은 여자(양희경 분)가 얼마나 집요해질 수 있는지, 남편을 잃은 여자(카작 분)가 얼마나 위태로워질 수 있는지, 무엇보다 보험금이 가족의 구원이 되는 과정이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것도 몰랐다.

용수의 허술한 계획 때문에 가장 복잡한 상황에 놓인 것은 늙은 선장(윤주상 분)이다. 애초에 그는 용수의 계획을 ‘짜고 치는 고스톱’ 정도로 여기고 협조에 동의했을 것이다. 작별의 순간에 이르러 비로소 이 ‘완전범죄’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인지 눈치채지만 이미 늦은 다음이다. 실종 선원을 신고하고, 마지못해 수색에 합류하고, 남들보다 먼저 조업을 시작해서 비난을 사고, 매일 부두에 앉아 있는 용수의 모친과 마주치는 것도, 귀화 신청에 실패해 추방 위기에 놓인 용수 아내의 절망을 실어 나르는 것도 그의 몫이다.

돈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순간, 순식간에 세상 모든 것은 일그러져 보인다. 자본주의 게임에서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승자는 소수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단박에 실패자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 그렇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권력과 계급까지 재편되고 나면 남은 자들의 초라한 ‘도토리 키 재기 게임’이 치열해질 차례다.

‘아침바다 갈매기는’의 마을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서로 호통치듯 말하며 악담과 저주, 악다구니를 퍼붓는다. 흡사 생존을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야생의 원시 사회를 보는 것 같다.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박이웅 감독을 다시 보게 만든다. ‘불도저를 탄 소녀’로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받았을 때 우리는 그의 최댓값을 이미 봤다고 은밀히 짐작했다. 그러나 이 작품으로 그는 우리가 가늠한 능력치를 손쉽게 뛰어넘는다. 무엇보다 ‘아침바다 갈매기는’의 가장 큰 성취는 윤주상 배우의 재발견이다.

그의 목소리는 몹시 친숙하고 세상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표정에는 어떤 과장도 없지만 그가 이토록 배우로서 빛나는 순간은 처음 목격한 것 같다. 그가 항구에서 배를 몰고 나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괴팍한 뱃사람의 표정 너머 윤주상 배우의 얼굴이 드러난다. 배우에게 기회는 언제 오는 것일까. 염치없지만 질문의 범위를 넓혀보자. 사람에게 기회는 언제 오는 것일까.

이렇게 묻고 나면 불현듯 우리의 앞날에도 희망이 보인다. 돈으로만 세상과 사람을 바라볼 때는 결코 가늠할 수 없던 새로운 미래다. 희망은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옥미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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