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충돌하는 지점입니다. 과거는 변하지 않기 위해 저항하고, 미래는 자신의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투쟁합니다. 현재가 항상 마찰과 갈등으로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갈등이 극대화되는 지점은 무모한 과거형 사고가 현재의 시계마저 거꾸로 돌리려 할 때입니다. 때로는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현재가 과거를 소환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2024년이 한국 사회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서 어떻게 부딪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습니다. 정치는 과거가 지배했습니다. 1월에 벌어진 사건들은 12월을 예견한 묵시록 같았습니다. 야당 대표는 흉기에 습격당했고, 대통령에게 항의하는 사람의 입을 틀어막는 입틀막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갈등도 시작됐습니다. 대통령 부인이 관심을 기울였다는 개식용 금지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도 1월입니다. 야당 정치인 테러, 권위주의적 정부, 대통령 부인의 국정 개입 등은 과거의 표식입니다.
총선을 앞두고 양당은 포퓰리즘적 정책을 쏟아냈습니다. 정부가 선거용으로 내놓은 의대 2000명 증원은 근거도 없었지만 한국 의료의 퇴행을 가져오는 데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채수근 상병 사망 사건 등을 숨기려 했던 행태까지 더해져 4월 총선에서 여당은 참패했습니다. 9월부터 지금까지 계속 폭로가 이어지고 있는 명태균 게이트는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을 끌어내렸습니다. 대통령과 야당은 대화라는 미래적 방식이 아니라 거부권과 관료 탄핵이라는 과거형 무기를 각각 20여 차례씩 행사하며 맞부딪쳤습니다.
한국 정치가 과거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세계의 시계는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오가며 대한민국을 압박했습니다. 관세와 정부 보조금이라는 과거가 되살아나 자유무역이라는 현재를 짓밟아 버렸습니다. 수출로 먹고살아야 하는 한국의 기업들은 수십조원을 들여 미국에 공장을 지어야 했습니다. 국부는 새어 나갔고, 내수는 망가졌습니다. 10분기 연속 내수 판매 마이너스라는 초유의 기록 속에 자영업자들은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정부와 정치권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방치했습니다.
인공지능(AI)이라는 미래는 삼성전자를 뒤흔들며 위기 상황으로 몰고 갔습니다. 중국은 과거 모델로 한국의 철강과 화학산업을 초토화시켰습니다. 롯데가 그 희생양이 됐습니다. 매년 수조원을 유형의 설비에 투자해야 하는 모델을 갖고 있는 한국 산업 구조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버렸습니다. 11월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며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과거라고 생각했지만 미국인들에게는 미래였습니다. 엘리트 중심의 민주당은 스스로 미래라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문제해결 능력이 없는 과거에 머문 집단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상반기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벌인 하이브와의 분쟁이 기억납니다. 그의 기자회견은 기업계에 만연해 있는 ‘개저씨 문화’에 대한 폭로 성명서였습니다. 이 사건은 뒤이어 벌어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안세영의 폭로와 연결됐습니다. 축구협회와 대한체육회도 과거가 지배하고 있음이 드러나 국민 밉상이 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10월은 빛나는 달이었습니다. 과거와 미래가 만나며 K컬처가 빛을 발했습니다. 10월 중순 블랙핑크 출신 로제는 한국 젊은이들이 하는 오래된 게임을 노래로 만들어 ‘아파트’라는 콩글리시가 전 세계를 흔들게 했습니다. 한강 작가는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현재를 살릴 수 있는가”란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12월 여의도 광장에 모인 수많은 국민들은 답했습니다. “그렇다.” 계엄령이라는 퇴행적 ‘내란행위’(검찰 표현)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단 11일 만에 민주주의적 방식(탄핵)으로 제압했습니다. 그 덕에 대한민국의 시계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2024년 신년호에 독자분들께 쓴 편지의 제목은 ‘평안이라는 단어의 소중함’이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한국 사회에서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격랑이 멈추고, 고요와 평안이라는 단어가 찾아드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였습니다.
헛되고 공허한 소망이었습니다. 평온과 고요라는 미래는 아무도 나에게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그 미래를 만드는 것은 오직 나 자신, 그리고 확장형인 우리라는 것을 새삼 느낀 한 해였습니다.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 할 2024년 연말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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