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엑스(옛 트위터)에 올라온 하나의 글이었습니다. 폭스비즈니스에서 코인 업계를 담당하는 기자가 대선 열흘 만인 11월 15일 자신의 계정에 “게리 겐슬러가 일각의 관측과 달리 자진사퇴할 가능성이 커보인다”고 적었습니다. 겐슬러는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으로 새 행정부와 무관하게 2026년까지 5년 임기를 채울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던 중이었습니다.
겐슬러는 재임 기간 기후변화 관련 위험 요소를 공개하도록 한 ‘환경 공시’를 도입하는 등 기업 공시 개선과 시장 투명성 제고 등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기업들의 반발에 맞닥뜨렸고 여러 소송에서 패배하면서 고전하던 중이었습니다. 코인에 대해서도 강한 규제를 추진하다가 일부 제동이 걸린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
선거 기간 코인 산업을 적극 포용했던 트럼프 당선인은 취임 첫날 겐슬러를 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상태였습니다. 겐슬러가 자신의 임기를 고집한다면 상당한 긴장과 불화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자의 관측은 맞아떨어졌습니다. 엿새 뒤 겐슬러는 트럼프 당선인의 취임날(1월 20일) 사퇴하겠다고 스스로 발표했습니다. 코인 시장은 급등했습니다. 트럼프 당선발 코인 시장 랠리는 이때 정점을 찍었습니다. 시장 참여자들이 겐슬러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SEC와 4년째 소송 중인 리플랩스의 CEO는 “이번 추수감사절에 감사할 일”이라며 이 소식을 공유했고 업계 전문지인 코인데스크는 “우리는 그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설을 냈습니다.
‘악마’ 같은 인상을 남기고 퇴장하는 겐슬러는 실제 이 산업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SEC 위원장으로서 그는 이 산업을 묘사할 때 “사기와 협잡과 장사치들이 판치는 곳”이라거나 “서부 시대 같은 무법천지”라고 했습니다. SEC는 그의 재임 동안 코인 기업들을 상대로 2700건의 집행조치를 취했고 210억 달러의 벌금을 부과하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랬기에 겐슬러는 블록체인·코인 업계로부터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 취급을 받았고 이제 그가 사라지는 만큼 앞으로는 산업이 번성하리라는 장밋빛 기대가 피어오르는 모양새입니다.
겐슬러는 한때 블록체인 전도사였다
1957년생인 겐슬러는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첫 직장인 골드만삭스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했습니다.(1979~97년) 그는 기업 인수합병과 재무회계 등에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1997~2001년 재무부에서 금융시장 담당 차관보, 국내 금융 담당 차관 등으로 일했고 이후 다시 민간 기업에서 일했습니다.2009년 오바마 정부에서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위원장으로 취임해 2014년까지 재임했으며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된 파생상품 시장에 대한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파생상품 거래 투명성을 높이고 시장 규제를 강화했던 도드-프랭크 금융개혁법 통과를 주도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겐슬러는 MIT 슬론 비즈니스스쿨의 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했습니다. 특히 블록체인 기술과 디지털 통화에 대한 연구 및 강의로 이름을 얻었고 학생 투표로 뽑는 우수 교수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2021년 바이든 정부가 그를 SEC 위원장으로 지명하자 “자신이 규제하게 될 기술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워싱턴에서는 보기 드문 인물”이라는 찬사가 나온 것은 그래서였습니다.
2018년 가을학기에 겐슬러가 가르쳤던 ‘블록체인과 돈’이라는 강의는 MIT 강연 공개(OCW) 웹사이트에서 지금도 10편 전편을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 블록체인 기술의 기본과 암호화폐 생태계의 특징, 기술적·정책적 도전과 그에 대한 대응 및 전망을 설명하는 강의이고 지금도 충분히 유효한 내용입니다.
겐슬러는 이 강의에서 금융산업에서 블록체인 기술이 “파괴적 혁신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최종 결제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유용성을 강조하고 결제 수수료처럼 기존 금융 시스템에서 ‘통과비’가 발생하는 분야를 파고들면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분석도 내놨습니다. 그는 금융기업들은 이미 기존 시스템에 많은 투자를 했기 때문에 선진적인 기술 도입과 급격한 변화에 취약하다면서 혁신적인 핀테크 기업은 충분히 기회가 있다고 짚었습니다.
거래 처리 속도나 기존 시스템과의 호환성, 탈중앙화 시스템의 거버넌스 문제 등 블록체인 기술의 논쟁적 지점에 대한 지적도 많은 이들의 견해와 일치합니다. 불법 활동을 방지하고 금융 안정성과 투자자 보호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합리적이고 상식적입니다. 이 강연에서 겐슬러는 기술과 산업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지극히 타당한 견해를 가진 전문가입니다.
SEC는 안팎으로 흔들리고 있다
이랬던 겐슬러는 어쩌다가 업계 전체의 ‘공공의 적’이 됐을까요. 심지어 겐슬러는 SEC 안에서도 인기가 없습니다. SEC는 최근 직원들의 높은 이직률로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겐슬러의 리더십이 문제라는 지적도 나왔지만 직원들이 떠난 이유는 격무가 원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원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SEC의 격무도 맥락이 있습니다. 겐슬러가 SEC 위원장에 취임한 이듬해인 2022년 코인 업계는 테라·루나 사태와 FTX 파산을 겪었습니다. 두 사건 모두 중대한 범죄가 결부됐다는 혐의로 미국에서 소송 중이고 일부 결론이 나와 FTX 창업자는 25년형을 받고 수감됐습니다. 세계 최대 코인 거래소 바이낸스 창업자 또한 자금세탁 규정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습니다. 이런 환경이라면 정상적인 규제 당국은 예민하게 산업을 들여다보고 엄격한 규제 잣대를 들이밀 수밖에 없습니다.
SEC는 이를 위해 더 많은 예산과 인력을 요구했지만 의회는 좀처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미국 주요 코인 기업들은 ‘명확한 규제는 없으면서 처벌만 한다’는 불평을 자주 늘어놨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규제가 명확하기만 하다고 해서 무조건 환영할 리는 만무합니다. 당연히 이의를 제기합니다. SEC는 안팎으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는 셈입니다.
겐슬러 사퇴 소식이 나온 지 몇 분 뒤 “SEC는 한 달에 하루만 일한다면서요?”라며 비아냥댄 사람이 있었습니다. 테슬라를 비상장 기업으로 전환하려고 자금을 확보했다는 트위터 발언으로 SEC로부터 증권 사기 조사를 받고 막대한 벌금을 냈던, 그리고 트위터 인수 과정에서 공시 문제로 SEC 조사를 받았던, 그리고 지금은 트럼프 당선인의 최측근이 된 일론 머스크였습니다.
겐슬러를 옹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퇴가 이 산업을 꽃피울 낭보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김외현 비인크립토 한국·일본 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