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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추위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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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은 폭설로 왔지만, 아직 큰 추위는 오지 않았다. 추위가 오지 않으면 꽃나무는 그 틈을 타 망울을 틔울 수도 있나 보다. 12월에 봄꽃이 피었다. 눈발보다 먼저 꽃을 피운 진달래도 있고 야금야금 햇볕을 갉는 개나리도 있다. 유난히 빛이 많이 드는 땅에서 이런 불시개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세상의 온도와는 다른 온도 때문에 꽃나무가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꽃의 내란을 잠재우는 것은 다름 아닌 겨울밤의 서리다. 계절을 잘못 읽고 움찔거리는 씨앗 위로 서리가 내리면 죽비 소리를 들은 듯 정신이 번쩍 드는지 개화에 제동이 걸린다고 한다. 식물이 계절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선 뜨거운 태양도 필요하지만, 수도를 잠글 만큼 꽁꽁 언 추위도 필요하다.

지금껏 우리의 삶은 계절보다 앞서갈 수 없었다. 자연 속에서 작은 사회를 배운다. 자연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움직이고 있다. 아직 저 산문 밖에 있는 봄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겨울이 따스해서 계곡이 울고 꽃이 울지만, 이 혼란 속에서도 자연은 정교하게 돌아가고 있다. 모나게 돋아난 것들이 자라지 않도록 곧 추위가 찾아올 것이다. 계엄령이라니! 최승호 시인의 ‘대설주의보’가 생각난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내가 아는 계엄령은 사람들의 발을 묶은 빛나는 눈의 은유였다. 4·19혁명도 5·18민주화운동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내가 실감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진짜 계엄령이 내려졌다.

세상이 시끄럽다. 일상을 살기에도 빠듯한 시간에 국민들이 여의도 국회 앞에 모였다. 내란을 공모하기까지 어떤 목소리들이 있었을까? 어떤 목소리들이 있었기에 이렇게나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걸까.

1인 미디어 시대에 총칼 앞세우는 군인이라니! 이 세계의 폭력에 대해, 죽은 자가 산 자를 위로할 수 있는 노래를 들려준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국가에서 계엄령이라니! 시간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우리만이 과거를 돌아볼 수 있으며, 과거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 우리는 깨어 있는 사람들이니까. 깨어 있다는 말은 얼마나 좋은가. 자연도 꽃과 나무가 제때 피어나라고, 제때 깨어나라고, 눈과 비를 준다. 폭풍과 폭설을 준다. 다 때가 있다.

함께 일어나 소리 높여 말하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상식적이지 않은 일에 반대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소중한 일상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족들과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사랑하는 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고, 머리맡에 둔 시집을 펼쳐 읽다 잠에 들기를.

마음을 잃지만 않으면, 일상은 계속된다. 며칠 전 남편이 자신이 짠 강의 시나리오를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부끄러움도 없이 내 앞에서 시뮬레이션했다. 너무 못했다. 고칠 부분을 조목조목 짚어주는데 자꾸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한바탕 그러고 나자, 아들이 내 방으로 들어와 소리 죽여 말했다.

“엄마, 저는 발표할 때마다 떨리거든요? 그런데 아빠가 잘했다고 잘할 거라고 아빠 앞에서처럼만 하라고 말해주면 마음이 놓여요. 그러면 다음날 발표를 진짜 잘했어요. 아빠가 내일 강의 잘할 수 있게 칭찬을 해줄 수 있어요?” 듣고 보니 다 맞는 말이다. 자기 전에 칭찬을 해주긴 했지만 이미 마음이 상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일을 마치고 온 남편은 정신 차리게 해줘서 고맙다고 쓴소리가 필요했다고 한다. 가끔 누군가에겐 죽비 내려치듯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세상의 말이 필요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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