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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여잔 싫어"…바람난 男에 세계인 열광하는 이유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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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천재야. 내게는 숨겨진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우리 엄마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잔소리만 하지만, 난 언젠가 위대한 사람으로 기억될 거야.’

사춘기 청소년들이 주로 하는 이런 생각을, 요즘은 흔히 ‘중 2병’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마다 정도는 달라도 이런 시기는 누구나 겪고 넘어가는 성장 과정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소년 에곤 실레(1890~1918)도 그랬습니다. 학교 성적도 좋지 않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구도 몇 없었지만, 그는 늘 자신이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레는 좀 특별했습니다. 그는 진짜배기 천재였거든요. 자아도취인 줄 알았던 그의 생각들은 모두 사실이 되었습니다. 28년에 불과한 삶에서 그가 제대로 작품 활동을 한 건 10년 남짓. 하지만 그는 이 짧은 기간 동안 결코 미술사에서 잊히지 않을 강렬한 이미지들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2022년 프리즈 서울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곳이 실레의 드로잉을 전시한 갤러리였다”며 “막 입학할 때는 고흐나 고갱을 좋아하던 미술대학 신입생들도 졸업할 때는 클림트와 더불어 에곤 실레를 최고의 작가로 꼽는다”고 말했습니다.

실레는 어쩌다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됐을까요. 왜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몰랐던 그의 작품에 끌리는 걸까요. 오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막을 올린, 실레의 대표작들을 만날 수 있는 전시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은 그 이유를 직접 느껴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지난 29일 전시를 미리 둘러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 베아트리체 갈릴리 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큐레이터 등 국내외 미술 주요 인사들이 “정말 놀라운 전시다. 어떻게 이런 작품들을 다 가져왔느냐”며 격찬할 정도로 숱한 걸작들이 온 ‘역대급’ 전시입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삼아,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실레의 주요 작품을 위주로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돌아보겠습니다.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은 사진 설명에 별도로 표기했습니다.
어린 천재와 클림트의 만남
실레는 1890년 오스트리아 빈 인근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철도 공무원이었습니다. 잘생긴 멋쟁이였지요. 그런 아버지를 실레는 어린 시절부터 동경했습니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차가웠거든요.

사정을 알고 보면 그럴 만도 했습니다. 실레의 아버지는 사실 매독에 걸린 사실을 숨기고 어머니와 결혼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옮긴 매독균 때문에, 어머니는 두 아이를 뱃속에서 잃어야 했습니다. 그런 뒤에야 아버지는 자신이 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털어놨습니다. 본격적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도 매독 때문. 몇 년 후 아버지가 정신 착란과 마비 증세를 보이면서부터였습니다. 매독이 악화돼 세균이 뇌까지 침투한 탓이었습니다. 결국 실레가 열네 살 때 아버지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 후 가장을 잃은 집안의 형편은 급격히 어려워졌습니다.


생계를 꾸리느라 바빴던 어머니는 아이들을 따뜻하게 대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존경했던 아버지가 사실 성병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 아버지가 미쳐가는 모습, 어려워지는 형편, 어머니의 한숨. 예민한 감성을 갖고 있었던 실레에게는 이 모든 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큰 슬픔,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 죽음, 성(性)과 죄의식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뒤얽혔습니다.

그래서인지 실레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학업 성적도 형편없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미술 과목에서만큼은 제대로 배우지 않았는데도 천재적인 재능을 드러냈습니다. 덕분에 실레는 성인도 입학하기 힘든 빈 미술 아카데미에 최연소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하지만 빈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전통적인 미술은 실레에게 지루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실레는 우연히 들어선 전시장에서 당대 최고 화가였던 ‘황금의 화가’ 클림트의 작품을 접하고 새로운 예술에 눈을 뜨게 됩니다. 클림트의 그림은 아름다우면서도 독특해서 빈 아카데미에서 접한 식상한 미술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나도 나만의 예술을 해서 클림트처럼 성공한 멋진 화가가 될 거야.’ 1907년 클림트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줄 용기를 낸 것도, ‘클림트처럼 되고 싶다’는 열망에서였습니다.

실레의 작품을 살핀 클림트는 직감했습니다. ‘천재다.’ 클림트는 이 젊은 화가를 적극적으로 키우고 밀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룹 전시회에 작품을 걸 기회를 주고, 경제적으로 힘들 때는 임시로 취직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알아봐 주기도 했습니다. 실레도 클림트를 스승으로 모시며 아버지처럼 따랐습니다. 클림트의 작품 구도를 따라 하기도 하고, 여러 기법을 배우며 그의 작품세계는 급성장했습니다. 그렇다면 클림트는 실레에게서 어떤 매력을 발견한 걸까요.


대가의 기술, 소년의 마음
어린 나이부터 완성에 가까운 기량을 선보이는 천재 예술가는 많습니다. 신동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가 음악입니다. 모차르트가 유럽 순회공연(연주 여행)을 시작한 게 6살 때였으니까요. 문학에도 이런 사례들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시인 랭보는 19살 때 주요 작품의 대부분을 완성했습니다. 영국 작가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기 시작한 나이도 18살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술은 이런 사례가 드문 편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 신동이었다고 해도 대부분의 경우 작품 세계를 꽃피우는 건 중장년인 경우가 많습니다. ‘번뜩이는 천재성과 창의력’도 중요하지만, 이를 표현하기 위한 그림 기술을 습득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실레는 드물게 발견되는 예외 사례였습니다. 데생 실력을 비롯한 그의 예술적 재능은 10대 때 이미 성숙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정신은 평균적인 자기 나이 또래 수준이었습니다. 그가 10대 중반에서 20대 초반에 남긴 기록과 행적을 보면, 실레가 전형적인 사춘기 청소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죽은 후 사람들은 나를 칭찬하고 내 예술에 감탄할 것이다” “나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이다”와 같은 말들이 일기와 편지에 수없이 등장하니까요.

실레의 사춘기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도 그야말로 강렬했습니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품고 있었지만, 인생 경험이 부족한 탓에 생각이 짧고 대인 관계에 서툴러서 자주 실수를 저지르곤 했습니다. 그는 성적 충동을 강하게 느꼈고, 멋 부리기 좋아했고, 잘난 척하기 좋아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해서 어려운 형편에도 자신을 힘껏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철없이 원망하기도 했고, 아버지 생각을 하면서 ‘세상에서 내가 가장 괴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실레 작품의 매력은 여기서 나옵니다. 다른 위대한 작가들은 오랫동안 쌓아 올린 기술로 성숙한 정신을 표현했습니다. 실레도 예술적인 기량은 그들 못지않았습니다. 하지만 실레의 정신은 아직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실레라는 사람 속에는 대가의 기술과 소년의 마음이 공존했던 셈입니다.

덕분에 실레는, 자신이 겪고 있는 청소년기 후반과 성인기 초반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다른 어떤 위대한 화가보다도 깊이 들여다보고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한 인간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과 ‘욕망의 발달’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실레만큼 잘 다룰 수 있었던 작가는 그전에도, 후에도 없었습니다.

이토록 지질한 청춘
마침내 실레는 1910년을 전후해 자신만의 화풍을 찾는 데 성공합니다. 20대에 들어선 그는 특유의 매력이 넘치는 강렬한 그림들을 연달아 그려냈습니다. 그의 그림만큼이나 실레의 삶에도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사건이 많았습니다. 가장 유명한 게 스물두 살 때 동네 어린아이들을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리다가 ‘미성년자를 유혹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은 것입니다. 다만 이는 누명이었습니다. 사회 통념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행동과 예술에만 몰입하던 실레의 성격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었지요.


실레의 연애도 드라마틱했습니다. 아버지를 닮아 미남에 멋쟁이였던 실레는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스물한 살 때 자기보다 네 살 연하의 그림 모델 발리 노이칠을 만나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실레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다방면으로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해 줬습니다. 문제는 실레가 노이칠을 그저 한 때의 연인으로만 생각했다는 겁니다. 당시 사회에서 모델은 비천한 직업으로 여겨졌거든요.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실레는 좋은 집안 출신 아가씨인 에디트 하름스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해 양다리를 걸친 후, 발리와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에디트는 적극적으로 실레를 압박했습니다. “발리와 더 이상 친하게 지내지 마. 나랑 같이 있고 싶다면 그녀를 정리해.” 실레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미술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중산층과 상류층 사람들에게 그림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좋은 집안의 여성과 결혼하는 게 유리했습니다.



반면 발리는 하층민이나 다름없는 신분. 고심 끝에 실레는 결국 발리를 정리하고 에디트와 결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결혼을 상당히 잘하려고 합니다. 다행히도, 상대는 발리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몇년씩 헌신한 연인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자기밖에 몰랐던 실레의 성격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실레도 오랫동안 쌓은 인연과 정을 단칼에 잘라내기는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문제는 그 아쉬움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실레는 카페에서 발리를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다 보니 이렇게 됐어. 미안하다. 그래도 우리 이렇게 다시는 안 볼 수는 없잖아. 우리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같이 몇 주동안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떨까?”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나왔던 발리는 당연히 아연실색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둘은 다시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실레는 에디트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영원히 철부지일 것 같던 그도 가장이 됐습니다. 이제 어른이 될 시간이었습니다.
소년은 어른이 되고
결혼 후 실레의 삶과 예술은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직접적인 계기 중 하나는 군 입대였습니다. 실레는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때문에 군대에 징집돼 군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전장에는 나가지 않았고 행정 업무를 주로 보기는 했지만, 여러 사람과 부대끼며 지내면서 실레는 세상이 참 넓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자신이 젊은 시절 고민하던 문제보다 훨씬 더 큰 고통과 고민을 품고 사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요. 그러자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게 됐고, 자연히 대인 관계도 원만해졌습니다. 말하자면 군대에 가서 철이 든 셈입니다.

그런데 실레에게 이런 변화가 꼭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예술가로서 실레의 가장 큰 특징이자 강점은 자신의 내면을 아주 깊숙이 들여다보고 그 디테일을 예민하게 감지해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실레가 오직 자신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지독한 자기중심적 인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타인과의 관계가 원만해지고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실레는 자기 내면을 바라보는 시선의 날카로움이 점차 무뎌져 가는 걸 느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는 일이었지만 예술가로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실레는 결혼까지 했습니다. 부부가 된다는 건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 실레에게 결혼은 온전한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어느 정도 포기하는 일이자, 자신의 예술을 바꿔야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20대 후반에 접어든 실레의 그림에는 이런 내적 혼란이 반영돼 있습니다. 급격히 성장하며 변신하던 그의 작품 세계는 인격과 환경이 안정되면서 점차 변화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합니다. 사람처럼 화풍도 성숙하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임신한 뒤 그린 걸작 ‘가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작품 속 실레의 가족을 상징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기는, 가까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인간은 모두 혼자이며 외로운 존재라고 말하는 것처럼.


한편 미술계에서 실레의 위상은 급격히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스승인 클림트가 세상을 떠난 뒤 실레는 새로운 예술가 그룹의 지도자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실레의 나이는 아직 스물여덟 살. 서른도 안 돼 천재성을 널리 인정받기 시작한 그가 앞으로 어떤 작품을 그릴지 사람들은 모두 기대에 차 있었습니다.
실레에게 끌리는 이유
하지만 끝은 허무하게 찾아왔습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염병(스페인 독감)이 돌았고, 실레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 에디트가 병에 걸려 10월 28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3일 뒤인 10월 31일, 같은 병에 걸려 있던 실레도 세상과 작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실레는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고 합니다. “나는 가야만 한다.” 너무나도 아까운 요절이었습니다.


얄궂게도 실레의 이른 죽음은 그의 폭풍 같은 삶과 작품을 더욱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실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젊은 날의 혼란을 자신의 날카로운 선 속에 담았습니다. 지질하고 못나고 자기중심적이고 방탕한 젊음의 모습을요.

너무나도 그 모습을 날것 그대로 보여줘서인지 사람들은 실레가 그린 나체의 자화상, 성적인 요소가 드러난 작품들을 보며 불편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때로는 충격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아와 성(性)의 발달이라는 것은 인간이 성장하면서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경험. 실레는 자신이 통과하는 그 격렬한 혼돈의 시간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탁월한 솜씨로, 10여년에 불과한 시간 동안 그 내면의 모습을 화폭에 옮기고 스러졌습니다. 덕분에 그의 작품은 미술사에 영원히 남는 ‘청춘의 아이콘’이자 젊은 날의 초상으로 기억될 수 있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과 루시안 프로이드와 같은 후대의 미술 거장들에게는 영감을, 청춘을 지나고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공감을, 청춘 이후를 사는 이들에게는 젊은 시절 겪었던 혼돈과 에너지를 돌아보게 하는 매력적인 존재로 말입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최근 기자가 출간한 책 <명화의 발견, 그때 그 사람>의 에곤 실레 부분을 줄인 것입니다. 책에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이야기를 비롯해 오스카 코코슈카, 리하르트 게르스틀 등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주요 작가들의 삶과 작품세계가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의 경쟁 이야기, 폴 세잔과 고갱 등 다른 대가들의 이야기도 함께합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서점,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굿즈샵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i>*국립중앙박물관 전시는 3월 1일까지 이어집니다.

**이 글은 에곤 실레(라인하르트 슈타이너 지음, 양영란 옮김), Egon Schiele: Love And Death(Jane Kallir 등 지음, 알베르티나 미술관 펴냄), 에곤 실레 - 불안과 매혹의 나르시시스트(장루이 가유맹 지음, 박은영 옮김), Egon Schiele : the Leopold collection, Vienna(Magdalena Dabrowski, Rudolf Leopold 지음, 뉴욕 MoMA 펴냄), Erwin Mitsch : Egon Schiele(Erwin Mitsch 지음), Gustav Klimt and Egon Schiele(구겐하임미술관 펴냄)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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