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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황제' 키신…손끝의 울림 멈추자 9번 커튼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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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밤 10시,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로비엔 전례 없는 ‘정체 현상’이 빚어졌다. ‘피아노의 황제’로 불리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53)이 예정에 없던 사인회를 공연 직후 열겠다고 밝히면서다. 20대 젊은 여성들은 “이게 무슨 일이야”라고 놀라워하며 빠르게 객석을 뛰쳐나갔고, 한 70대 노부부는 “사인회 안 한다고 해서 앨범도 안 가지고 왔는데…”라고 말끝을 흐리면서도 줄을 설 수 있는지 연신 두리번거렸다. 사인회 줄이 이미 마감됐다는 안내요원의 외침에도 ‘키신의 얼굴과 손만이라도 보겠다’는 사람들은 반원형의 ‘구름 인파’를 이루며 한동안 자리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가 어떤 피아니스트인지 일단 들어보면 이런 반응이 괜한 호들갑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키신은 지난 40년간 세계 최정상 자리를 한순간도 놓쳐본 적 없는 ‘불세출(不世出)의 피아니스트’다. 1971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2세 때 악보 없이 즉흥 연주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그는 13세에 모스크바 국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을 협연한 무대에서 믿을 수 없는 연주력을 선보이며 이름을 알렸다. 1980년대 피아니스트 키신은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레핀, 막심 벤게로프와 함께 ‘러시아 신동 삼총사’로 불렸다. 17세 때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 음악회 솔리스트로 발탁된 데 이어 19세 때 미국 카네기홀의 100주년 기념 공연 오프닝 무대 주인공으로 선정되면서 유럽과 미국 클래식 음악계를 뒤흔들었다. 그해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솔리스트로 발탁된 그는 지금까지 그래미상, 에디슨상, 황금 디아파종상, 그랑프리 뒤 디스크상, 에코 클래식상 등 주요 음악상을 모조리 휩쓴 피아니스트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카라얀의 딸 아라벨이 “내 생에 딱 한 번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봤는데, (이는)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키신의 오디션 직후였다”고 언급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2021년 이후 3년 만에 한국 청중 앞에 선 키신. 그는 50대란 나이가 무색하게 잠시도 집중력과 여유를 잃지 않으면서 무대를 완전히 장악해나갔다. 첫 곡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7번에선 섬세한 손끝 감각으로 선율을 천천히 조형해나가며 작품 고유의 담백하면서도 깊이 있는 서정을 완연히 드러냈다. 선율마다 풍부한 색채를 덧입히면서도 지나친 감정 표현은 자제했고, 고음과 저음, 장음과 단음, 연결과 단절 등의 대비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면서 작품의 전체 구조와 짜임새를 깔끔하게 풀어냈다.

이후엔 쇼팽 ‘녹턴 작품번호 48-2’와 ‘환상곡 작품번호 49’를 연이어 들려줬다. 그는 건반을 누르는 깊이와 무게, 페달 움직임, 피아노의 배음과 잔향 효과를 예민하게 조율하며 몽환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쇼팽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살려냈다. 특히 하나의 선율 안에서 밀도를 달리하며 유연하게 움직이는 손놀림으로 시종 단단한 음색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환상곡의 기품과 활기를 펼쳐내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환상곡 말미에선 작품에 담긴 깊은 고뇌의 밑바닥까지 모조리 끌어내겠다는 듯 건반 하나하나를 무겁게 누르며 긴장감을 고조시켰고, 이를 통해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우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다음 작품은 브람스 ‘4개의 발라드’. 키신은 보통 연주 속도보다 훨씬 천천히 이 곡을 연주했는데, 빠르기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진솔한 고백적 어조로 악상을 충실히 표현하는 데 방점을 찍은 듯했다. 1악장에서 마치 작은 눈덩이를 굴리며 서서히 몸집을 키우듯 예민하게 진행되는 셈여림 변화와 묵직한 타건으로 비극 속으로 침잠하는 선율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면, 2악장에선 매 선율을 치밀하게 계산해 연주하기보다 자신이 이해한 작품의 어법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며 몽환적인 악상을 생생하게 펼쳐냈다. 4악장에선 건반의 깊이를 제한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선율의 색채에 미묘한 차이를 둬 브람스의 애수를 담담히 읊어냈다.

마지막 작품은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2번이었다. 1악장에선 전체를 관통하는 긴 호흡을 유지하면서도 날카로운 리듬과 기교 처리, 정돈된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게 연주하는 기법)으로 원시적이면서도 묘한 선율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드러냈고, 4악장에선 건반에서 손이 튀어 오른다고 느껴질 정도로 탄력이 강한 터치로 역동감을 불러내며 완성도 높은 연주를 들려줬다.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긴밀한 호흡과 극적인 악상 표현,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강한 응집력과 음향적 입체감을 만들어내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키신은 소리를 조심스럽게 낸다기보다 중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손의 무게를 건반에 떨어뜨리면서 만들어내는 투박한 타건으로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타악기적 성격을 명징하게 드러냈고, 뚜렷한 방향성과 강한 추진력으로 모든 음을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끌면서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했다.

잠깐의 정적 후 그가 건반에서 손을 떼자, 2000여 명의 청중은 귀가 터질 듯한 환호성과 기립박수로 뜨겁게 호응했다. 아홉 번의 커튼콜, 세 번의 앙코르를 넘기고 객석에 퇴장을 알리는 조명이 들어온 뒤에도 사람들은 좀처럼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그럴 만한 무대였다. 누구나 인정할 만한 거장 자리에 올랐음에도 단 한 음도 허투루 치지 않는 그의 손 움직임에서 40년간 전성기를 이어오는 비결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음악에 대한 무한한 헌신(獻身)과 타고난 재능에 기대지 않는 처절한 분투(奮鬪). 그의 지난 세월을 이보다 더 정확히 표현할 문구가 있을까.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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