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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결혼한다더니"…'잠수' 후 새장가 든 배신男의 반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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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은 헤어져 있어야 하겠지만, 고향에서 일이 정리되면 곧바로 돌아올게. 그때 우리 결혼하자.”

전쟁이 터지자 남자는 그 말을 남기고 고향으로 떠나갔습니다. 여자는 기다렸습니다. 남자의 말을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별은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습니다. 이듬해 남자에게서 날아온 편지 한 통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아직은 돌아갈 수 없어. 사정이 그렇게 됐어. 조금만 더 기다려 줘.” 그리고 또다시 1년 뒤, 남자는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이제 일이 거의 다 정리됐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연말에는 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여자는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계속 흘렀습니다. 여자의 불안은 분노에서 걱정으로, 그리고 체념과 슬픔으로 바뀌었습니다. 여자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은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때는 혼란스러운 전쟁 통이었습니다. 그렇게 6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여자는 남자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소중히 보관했습니다. 황당한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요.

“남자분의 물건들을 즉시 반환해주십시오.” 난데없이 나타난 변호사는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설명을 듣던 여자는 기가 찼습니다. 남자가 3년 전에 27세 연하의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아이까지 낳았으며, 이제 여자와 함께 살던 집에 두고 온 물건을 돌려받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는 소리쳤습니다. “내가 무슨 물품 보관소야? 절대 못 줘!” 그렇게 소송전이 시작됐습니다.



여자를 배신한 그 파렴치한 남자의 이름은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 추상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화가였습니다. 피해자인 여성은 칸딘스키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화가 가브리엘레 뮌터(1877~1962). 이 둘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뮌터가 보관하고 있던 칸딘스키의 물건과 작품들은 누구에게 갔을까요. 두 사람의 사랑, 작품 세계와 추상미술, 배신과 좌절에 얽힌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사랑의 시작
1902년 독일 뮌헨의 팔랑크스 미술학교. 스물다섯 살의 학생 뮌터와 서른여섯 살의 선생 칸딘스키는 이곳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독일 상류층 집안 출신의 뮌터는 주관이 뚜렷하고 예술에 재능 있는, 화가를 꿈꾸는 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엔 여성이 다닐 수 있는 제대로 된 예술학교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취미 생활이라면 몰라도, 여자는 훌륭한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게 당시 사회 분위기였거든요. 하지만 칸딘스키가 설립한 이 학교는 달랐습니다. 칸딘스키는 여성을 차별하지도 않았고, 뮌터의 재능을 인정해 줬습니다.



러시아에서 법대 교수였던 칸딘스키는 서른 살의 어느 날 갑자기 교수직을 내던지고 예술에 뛰어든 괴짜였습니다. 비록 화가 경력은 얼마 안 됐지만, 그는 뛰어난 예술 이론가이자 진지한 예술가였습니다. 게다가 지적이고 매력적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끌렸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칸딘스키가 유부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칸딘스키는 뮌터를 설득했습니다. “아내와는 이미 끝난 사이나 다름없어. 곧 이혼할 거야.” 그리고 그건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아내도 칸딘스키의 이혼 요청을 군말없이 받아들여줬으니까요. “당신 앞에서 날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아.” 이렇게 말하며 약혼반지를 건네는 칸딘스키에게, 뮌터는 마음을 허락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연애는 시작됐습니다.



예술의 길을 함께 걸으며 두 사람의 작품 세계는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미술을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뮌터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칸딘스키는 아직 자신이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다른 예술을 해야겠고 대충 감은 잡히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다’는 게 칸딘스키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뮌터를 만나고 예술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칸딘스키는 점차 자신이 원하는 예술이 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칸딘스키는 깨달았습니다. “그래, 우리가 원하는 건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게 아니야. 말로 표현할 수도, 꺼내서 보여줄 수도 없는 감정과 생각을 그림에 담는 거야.” 그 순간 기억 속 여러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예컨대 고향에서 본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모네의 ‘건초더미’ 그림이, 거의 빛과 색채만 남아 뭘 그렸는지 잘 알아볼 수 없는데도 여전히 아름답다는 사실을 느꼈을 때. 바그너의 오페라를 감상하며 눈앞에 여러 색이 불꽃놀이 하듯 폭발하는 듯한 신비로운 경험을 했을 때. 뮌터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 ‘아무리 잘 그린 그림이라도 사진만큼 사실적일 수는 없다’고 느꼈던 순간들 말입니다.

그렇게 칸딘스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추상의 세계로 뛰어들었습니다. 뮌터 역시 칸딘스키가 있었기에 자신만의 화풍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칸딘스키의 영향을 받아 뮌터는 색에 자신의 감정을 담았습니다. 자연에서 따온 풍경에 사진을 찍었던 경험을 살려 과감한 구도를 짜고, 강렬한 색과 단순화된 형태로 따뜻한 감성을 입히면서 뮌터의 독창적인 그림은 탄생했습니다.

빛나던 날들, 그리고 그림자
1909년, 두 사람은 연애 7년 만에 마침내 함께 살기 시작합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나가는 두 사람은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그 빛은 프란츠 마르크를 비롯한 주변의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함께 끌어들였습니다. 서로의 생각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칸딘스키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화가들은 ‘그림은 추상적일수록, 즉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수록 순수하고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뮌터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화가들은 ‘그래도 그림에 알아볼 수 있는 모양은 조금 있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사실적으로 사진처럼 그린다고 해서 좋은 예술 작품은 아니다’는 데는 모두 공감했습니다. 이들은 한데 모였고, 자신들을 ‘청기사파’로 불렀습니다.



1911년 청기사파는 마침내 전시회를 시작합니다. 칸딘스키가 최초의 ‘완전 추상화’를 그린 것도, 자신의 책(예술에서의 정신성에 관하여)을 통해 추상미술 이론을 정립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칸딘스키는 이렇게 썼습니다. “색은 영혼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힘이다. 예술가는 색이라는 건반을 쳐서 영혼에 진동을 불러일으키고 음악을 연주하는 존재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칸딘스키에게 실제로 있는 장면이나 물건을 그리는 건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중간 유통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예컨대 화가가 슬픔이라는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얼굴을 그렸다고 해 봅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관객들은 그림을 보고 슬픔을 느끼기보다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칸딘스키는 그게 싫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순수한 선(線)과 색(色)만으로 보는 사람의 영혼을 울리고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중간 유통을 생략해 감정을 직접적으로 ‘직거래’하자는 겁니다. 오늘날 현대미술의 주류가 된 추상미술의 탄생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아무렇게나 해놓은 낙서 같다”는 혹평이 쏟아졌고, 작품 전시를 거부당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추상화는 보는 사람이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고, 여기에 더해 작가와 관객의 주파수가 잘 맞아야 의미와 감정이 제대로 전달됩니다. 예컨대 감수성이 아주 예민한 사람은 칸딘스키의 작품을 보면 음악이 들리는 듯한 경험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고, 적당히 알아볼 수 있는 모양이 있어야 작가의 감정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생산자와 직거래할 수는 없고, 그게 꼭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처럼요.

이 무렵 칸딘스키와 뮌터의 관계에도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이혼 절차만 마무리되면 바로 당신과 결혼하겠다”던 칸딘스키. 하지만 모든 절차가 끝난 후에도 뮌터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칸딘스키는 뮌터와 자신의 성격이 아주 다르고, 그 차이를 결코 메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뮌터가 직선적이고 솔직한 성격이었다면 칸딘스키는 갈등을 극도로 회피하는 성격이었거든요. 뮌터가 칸딘스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었던 이유입니다. “나는 당신이 없을 때는 외로워요.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어요. 당신과 함께 있어도 외롭다는 거예요.



여기에 더해 청기사파 화가들의 사이도 나빠졌습니다. 전시가 극심한 비난을 받자 화가들이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만만한 표적은 청기사파 유일의 여성이었던 뮌터였습니다. 청기사파 화가의 아내들도 한마음 한뜻으로 뮌터를 욕했습니다. 예술적 재능이 있었지만 남편을 뒷바라지하느라 작품 세계를 펼치지 못했고, 그래서 내심 뮌터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뮌터에게는 모욕적인 별명이 덧씌워지게 됩니다. 청기사파를 좀먹는 ‘좀나방’.
‘비열한 무시와 침묵’
1914년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은 예술계를 뒤흔들었습니다. 청기사파의 핵심 화가들이 전장에 끌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행히도 칸딘스키는 전쟁에 끌려가진 않았지만, 독일의 적국인 러시아 사람이었기에 몸을 피해야 했습니다.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요.



뮌터는 칸딘스키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몇 달 후 도착한 건 뜬금없는 편지였습니다. “우리 이제 친구로 지내는 게 좋겠어.” 뮌터는 황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얘기냐,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지 마라”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우유부단한 칸딘스키는 뮌터가 비난을 퍼붓자 사과했습니다. “알겠다, 미안하다. 결혼 약속은 지키겠다. 그렇지만 독일로 당분간 돌아갈 수는 없겠다.” 하지만 칸딘스키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확실했습니다. 띄엄띄엄 답장을 보내던 칸딘스키는 독일을 떠난 지 2년이 흐른 1916년 결국 연락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칸딘스키는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이 헤어진 지도 어느덧 6년. 제1차 세계대전에 더해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혁명까지 일어난 상황이었습니다. 분노와 우울에 시달리던 뮌터는 마침내 체념했습니다. ‘소식이 없는 걸 보니, 난리 통에 세상을 떠났나 봐.’ 혼자가 된 뮌터는 함께 살던 집에서 칸딘스키가 남긴 소중한 그림과 물건들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기곤 했습니다.



그런데 1920년,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칸딘스키가 독일로 돌아왔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는 뮌터에게 결코 기쁜 일이 아니었습니다. 칸딘스키가 자기보다 27살이나 어린 아내를 데려왔거든요. 알고 보니 칸딘스키는 연락이 끊기고 나서 1년 뒤인 1917년 러시아에서 새 장가를 들었습니다. 더욱더 황당한 건 칸딘스키가 뮌터에게 변호사를 보냈다는 겁니다. “저는 칸딘스키의 변호사입니다. 칸딘스키 씨는 같이 살던 집에 남기고 간 짐과 그림들을 돌려받고 싶어 합니다. 즉시 반환해 주십시오.”

뮌터는 직접 찾아오지도 않고 변호사를 보내는 칸딘스키를 맹비난했습니다. 뮌터는 칸딘스키의 행동을 두고 “비열한 무시와 침묵”이라고 말했습니다. 법정 공방 끝에 뮌터는 칸딘스키가 남겨둔 짐의 극히 일부만 돌려주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림의 대부분은 뮌터의 소유로 남았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엔
쓰라린 배신과 좌절에도 뮌터는 삶의 균형을 잃지 않았습니다. 뮌터는 칸딘스키와 헤어진 후에도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오히려 개인적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더욱 과감한 표현을 시도했습니다. 새로운 사랑도 만났습니다. 그러는 사이 세상은 또다시 급격하게 바뀌었습니다. 독일의 권력을 잡은 나치는 자신들의 사상을 담은 이해하기 쉬운 미술만을 권장하고, 그렇지 않은 추상예술 등은 ‘퇴폐미술’로 몰아 탄압했습니다. 칸딘스키도 나치의 탄압 대상 중 하나였습니다. 1933년 탄압이 시작되자 칸딘스키는 프랑스로 도피했고, 1944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냉담한 남자였다.” 세상을 떠난 칸딘스키를 뮌터는 이렇게 건조하게 회고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957년 뮌터의 선택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지하실에 보관해오던 칸딘스키와 청기사파의 작품들을, 1957년 독일 렌바흐하우스 미술관에 대거 기증한 겁니다. 여기엔 칸딘스키의 작품 수백 점과 청기사파 다른 멤버들의 여러 작품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 기증 덕분에 세계는 청기사파를 추상미술의 선구자들로 재조명하게 되고, 렌바흐하우스는 청기사파 예술 운동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이로서 잊힐 뻔했던 추상미술의 탄생 이야기는 뮌터 덕분에 새로 쓰였습니다.

왜 뮌터는 사랑을 배신한 칸딘스키와 자신을 ‘좀나방’이라 불렀던 청기사파 작가들의 작품을 소중히 보관하고 세상에 내놨을까요. 개인적인 원한만 생각하면, 이 작품들을 모두 불태워도 이상하지 않았을 겁니다. 작품을 돌려달라는 칸딘스키의 요구를 거절하고 그림들의 행방에 대해 입을 다물었던 건 분명 일종의 복수였습니다. 예술가에게 작품은 자식과도 같은 것. 자신이 전성기에 그린 작품들의 생사조차 모르는 상황은 분명 칸딘스키에게도 큰 고통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뮌터는 이 작품들이 영영 사라지는 건 원치 않았습니다. 칸딘스키에게 미련이 남아서는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는 가장 빛났던 시기 두 사람의 영혼이 담겨 있었고, 당시 그들이 꿈꾸었던 예술의 혁명이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추상미술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담아내는 예술. 뮌터는 칸딘스키를 가장 깊이 이해한 사람이자,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작품 속에 담긴 시대의 꿈과 예술혼, 젊은 나날 아름다웠던 기억을 이렇게나마 영원히 남기고 싶었던 겁니다.



결과적으로 뮌터 덕분에 청기사파는 재조명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뮌터 역시, ‘천재 예술가에게 배신당한 연인’이 아니라 청기사파의 위대한 화가이자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재조명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뮌터를 ‘추상미술의 어머니’라고 불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뮌터가 칸딘스키가 추상미술의 세계를 열어젖히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가장 힘든 시기 그 결과물을 지켜냈으며, 마침내 세상에 내놓아 꽃피우게 했기 때문입니다. 최근 몇 년 새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미술관, 스페인의 티센-보르네미서 국립미술관 등 세계적인 미술관들이 앞다퉈 뮌터를 재조명하는 전시를 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회에 걸친 청기사파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청기사파의 맥을 잇는 화가 파울 클레의 이야기는 추후 출간될 책(3권)에서 다루겠습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i>*이번 기사는 청기사파 ① 프란츠 마르크 편(“이걸 돈 받고 팔아?"…'사기 논란' 수백억짜리 작품 뭐길래)과 함께 보시면 좋습니다.

**가브리엘레 뮌터(보리스 폰 브라우히취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Gabriele Munter: The Years of Expressionism 1903~1920 (Reinhold Heller), Wassily Kandinsky and Gabriele Munter: Letters and Reminiscences 1902~1914 (Annegret Hoberg), Kandinsky: A Retrospective(Angela Lampe, Brady Roberts), 칸딘스키와 청기사파(지빌레 엥겔스, 코르넬리아 트리슈베르거 지음, 홍진경 옮김) 바실리 칸딘스키(하요 뒤히팅 지음, 김보라 옮김) 청기사 20세기 예술혁명의 선언(바실리 칸딘스키, 프란츠 마르크 등 지음, 배정희 옮김), Kandinsky, Munter and the Blue Rider(테이트 펴냄)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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