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선술집 하나가 들어서 있다. 낙지볶음, 조개탕 같은 정감 있는 안주 이름이 적힌 입간판과 낡아빠진 나무 탁자들이 어지럽게 놓였다. 술집은 현대미술 거장 이강소(81)의 설치작품이다. 그는 1973년 첫 번째 개인전에 내놨던 ‘소멸-화랑 내 선술집’을 재해석했다. 50여 년 전 이강소는 명동화랑 주변 간이주점에서 탁자와 의자를 몽땅 빌려와 전시회장을 술집처럼 꾸몄다. 이강소는 “미군 부대에서 불하받은 나무판자로 만든 탁자에서 아저씨들이 막걸리를 마시며 웅성거리는 광경이 참 근사했다”며 “동시에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기획한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이달 개막한 이강소 개인전은 한날한시의 기억도 똑같이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을 암시하며 시작된다. 전시회 제목은 ‘이강소: 風來水面時(풍래수면시)’. 바람이 물을 스칠 때라는 뜻으로 새로운 세계와 맞부딪치며 깨달음을 얻은 작가의 의식을 담았다. 전시엔 1970~1980년대 이강소의 회화, 설치, 조각, 이벤트 등 100여 점이 나왔다. 이강소가 국내에서 실험미술 운동을 전개하면서(1970년대) 파리 시드니 도쿄 상파울루 등을 오가며 세계 현대미술의 흐름을 접한 경험을 바탕으로 회화적 시기에 몰두하기 시작한(1980년대) 때였다.
전시에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열려 있는 회화 작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표현도 흐릿하고, 마치 덜 그린 듯 간략한 작품이다. 개개인의 기억과 경험이 또 다른 해석을 낳는다는 점에서 캔버스에 관람자의 감상이 서 있을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이강소는 “일부러 그림을 덜 그리려 한다”며 “스스로의 경험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회화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해석의 단초를 열어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평론가 이일이 “이강소의 회화는 이미지와 실재의 기묘한 관계를 보여준다”고 한 건 이강소가 구축한 예술세계에 접근하는 힌트다. 동물원이던 창경원에서 본 오리를 소재 삼은 것으로 알려진 새 그림이 대표적이다. 이강소는 정작 어떤 동물을 그렸는지 드러내지 않는다. 그림의 에센스(본질)는 새가 아니라 주변에 일어나는 물의 파동으로 새가 살아 있는 존재임을 느끼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 충족되면 보는 사람에게 오리여도, 백조여도 상관없는 것이다.
사슴을 그렸지만 얼굴 없는 사슴인 ‘무제-91193’은 존재의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각도에 따라 수많은 사슴의 얼굴이 담겨 있다. 살아 숨 쉬는 사슴은 앞을 볼 때도, 옆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다는 점에서 존재할 수 있는 여러 경우의 수를 한 화면에 담은 것이다. 전시는 내년 3월 30일까지.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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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모더니즘에서 벗어나 한국 고유의 현대적 미학을 찾으려 노력한 이강소의 예술세계에 대한 심층 인터뷰는 오는 30일 발간되는 아르떼매거진 12월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