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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손 편지와 뜨개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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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2025학년도 수능시험이 있었다. 역대 가장 따뜻한 수능 날이었다고 한다. 아직 겨울은 저 단풍나무 밖에 있나 보다. 그나저나 달력을 한 장만 더 넘기면 12월이다. 기온은 점점 떨어질 것이고 겨울은 언 손에 입김을 불며 부지런히 걸어오겠다.

올겨울은 어떻게 보낼까. 문득 편지를 쓰고 뜨개질하던 내가 떠올랐다. 관습처럼 겨울이 되면 누구에게라도 마음을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럴 때면 스탠드 불빛이 고요히 내려앉은 책상 위에서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느리게 한 글자, 한 단어, 한 문장 써 내려가다 보면 편지 속의 누군가가 세상 둘도 없이 소중하고 애틋해졌다. 그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 종이 위에 붙잡아 둘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하마터면 잃을 뻔했어. 어떤 마음은 편지가 되려고 내 속에 머물러 주나 보다’ 눈앞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묘한 안도감이 온몸에 퍼졌다.

편지를 다 쓰고 나면,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오래오래 뜨개질했다. 느리게 한 코, 두 코, 무늬가 되도록. 창문 너머 어스름이 깔릴 때까지 두 손을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겨우내 조끼 두 개를 떴다. 남편과 시어머니 조끼였다. 언제 다 뜰까 했는데, 천천히 조금씩 뜨다 보니 막막한 마음도 이내 사라졌다. 실과 실이 만나는 자리를 골목이라고 부르고 모퉁이와 모퉁이가 모이는 시간을 무늬라고 불러 봤다. 그늘도 잎사귀가 짜놓은 조끼 같다. 담쟁이덩굴은 뿌리를 멀리 두고 어느 굴뚝을 덮어가는 홀 가먼트 같다. 봄부터 담쟁이는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일까.

도서관으로 편지 한 통이 와 있다. 편지 봉투에는 보낸 사람의 이름 옆에 우표가 붙어 있다. 우표 속에는 파란 새벽하늘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시도 잘 쓰고 마음은 더 잘 쓰는 S가 수도원에서 보낸 편지였다. 편지는 ‘소연 시인님 보세요’ 하고 시작했다. 보세요…. 손으로 쓴 글씨가 특유의 억양이나 목소리처럼 다가온다. 어쩐지 읽기보다 가만가만 봐야 할 것 같다. 그림처럼 얼굴처럼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S가 있는 그곳에선 휴대폰도 사용할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다고 한다. 공간을 맴도는 침묵 탓인지 편지글에는 얼마간의 고독이 묻어 있었지만 그만큼 더 귀한 사랑도 묻어 있었다. S의 편지를 들여다보는 동안 언어로 짠 조끼를 껴입은 듯 마음이 따뜻해졌다. 문명이 빠져나간 자리에 천천히 공들여 쓴 편지 한 통이 놓인다면 이런 것일까? 그런 편지를 읽은 것만 같다.

중학생 아들이 묻는다.

“다음 주가 결혼기념일이에요?”

“응. 뭐 해 줄 건데?” “편지?”

선물은 없단다. 귀한 편지인 줄 알면서도 괜히 조금 서운해지려는데, 휴대폰 앱이 자꾸만 과거의 하루를 무작위로 보여준다. 다시금 곱씹으라고 기억을 꺼내 보여준다. 아들의 편지를 찍은 사진이다. 한 문장이 유독 눈에 띈다. “전 재산 1만원을 드립니다.” 편지와 함께 전 재산을 바치는 아들을 둔 적이 있었다니! 아들은 사진 속 자신이 쓴 편지를 보며 한바탕 웃었다. 문명도 과거가 빠져나간 자리에 멋지게 놓이는구나…. 옅은 기쁨이 번졌다.

소설가 한강이 소설가로 등단하기 전에 대학문학상을 받은 시의 제목이 ‘편지’다. 편지글 형식을 빌려와 “꽃 피고 지는 길”의 사랑과 눈물과 목숨과 기억을 노래했다.

“당신 없이도 천지에 봄이 왔습니다/눈 그친 이곳에 바람이 붑니다/더운 바람이/몰아쳐도 이제는 춥지 않은 바람이 분말 같은 햇살을 몰고 옵니다”

친구와 멀어진 것을 깨달은 어느 날에는 집으로 돌아와 어김없이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면서 나를 돌아봤고, 진실함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어쩌면 편지는 타인이 나의 언어를 입고 자기를 기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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