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에게 회식 자리에서 "이제 그만 좀 드셔라"고 얘기한 것은 '성희롱'이 될 수 없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부적절한 발언이지만 징계 대상인 '직장 내 성희롱'으로 보기 어렵다는 취지다. 특히 회사측과 노조 여성위원회 모두 "성희롱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지만 정작 고용노동청은 성희롱이라며 회사에 '시정지시'를 내린 사실도 밝혀져 논란이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전주지방법원 12민사부는 지난달 23일 국민연금공단 근로자 A씨가 공단을 상대로 낸 징계무효확인의 소에서 이같이 판단하고 근로자 측의 손을 들어줬다.
동료에 "너무 많이 먹는다" 핀잔
2012년 국민연금공단에 입사한 A씨는 공단 노동조합 소속 한 지회의 간부를 맡게 되면서 예전에 같이 일했던 공무직 B씨를 간부로 임명해 노조 업무를 함께 해왔다.2022년 11월 노조 회의 후 중국 음식점에서 회식하던 중 A는 옆자리에 앉은 B에 많은 식사량을 지적하며 "아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것 아는데 관리 안 하시냐" "이제 그만 드셔야 하는 것 아니냐"는 등의 발언을 했다. 이에 B가 "하면 안 되는 거 아시면 하지 마시라"고 응수했지만, A는 "관리 좀 하시라”, "(살) 찌기 전을 봤으니 하는 말이다"라고 지적을 이어 나갔다.
이튿날 B는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며 회사에 성희롱 피해 신고를 했다. 회사는 성희롱·성폭력 고충심의위원회를 열어 사실조사를 펼쳤다.
하지만 징계위는 "'너무 많이 먹는다' , '그만 먹어라' , '관리 좀 하라'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한 것은 사회통념상 모욕감을 느낄 수 있는 부적절한 발언"이라면서도 "불쾌할 수는 있으나 '성적' 표현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A에 주의 조치를 내렸다. 회식을 함께했던 다른 직원이 "A가 평소 다른 사람에게도 농담 식으로 하는 발언"이라며 "의도를 갖거나 제3자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등 불편한 분위기를 조장하지 않았다"고 진술한 점도 근거가 됐다.
이에 B는 노조 여성위원회를 찾아갔지만, 여기서도 "언어적 성희롱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성폭력 사건이 아니라고 결정 내렸다.
회사와 노조 모두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여 주지 않자 B는 아예 고용노동청을 찾아가 성희롱 피해 신고를 했다. 그런데 노동청에서는 조사 끝에 지난해 11월 "직장 내 성희롱 금지 규정을 위반한 사실이 확인됐다"며 공단을 상대로 '시정 지시'를 내렸다. 시정지시에 불응하면 과태료가 부과된다.
시정지시를 받아든 공단 징계위는 판단을 180도 바꿔 A에 대해 '직장 내 성희롱'을 이유로 '견책' 처분을 내렸다. 공단에서 견책 징계를 받으면 6개월 동안 승진이 제한되고 3년 동안 보수 승급이 제한된다. 징계위는 "전체 맥락상 외모 관리 관련 발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며 "노동청도 성희롱으로 인정한 점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A가 징계가 무효라며 소송을 제기한 것. 재판에서 A는 "성희롱으로 보기 어렵고, 성희롱이라고 해도 공식징계 처분은 부당하다"라고 주장했다.
법원 "외모 평가가 무조건 성희롱은 아냐"
법원은 A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식사량이 너무 많다는 의미로 트집 잡는 말에 이어 '관리 하라'는 말까지 하는 등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언행으로 보이고, '외모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내포돼 있다고 볼수도 있다"면서도 "'부정적인 외모 평가'로 볼 수 있다고 해서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등을 막론하고 항상 직장 내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꼬집었다.이어 "(성희롱으로 보려면) 객관적으로 일반적이고도 평균적인 사람으로 하여금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행위가 인정돼야 한다"며 "사내 징계위와 노조 위원회 역시 '부적절한하지만 성희롱으로 보기 어렵다'는 판단을 한 점, 고용노동청 시정지시는 당사자 진술을 직접 듣지 않고 사내위원회 조사 결과를 토대로 법적 평가만 한 점 등을 고려하면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행위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A에 대한 징계가 위법 무효라고 판단했다.
어떤 행위가 성희롱으로 평가되면 최대 해고처분 등 징계 대상이 되고, 불법행위가 돼 손해배상책임이 발생할 수도 있다. 사회적 지탄을 받는 것도 수순이다.
일반적으로 '상대방이 불쾌하면 성희롱'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지만 법원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판단한다. 앞서 사례와 반대로 그만 먹으라고 말한게 성희롱이라고 판단한 사례도 있다. 실제로 지난 2020년 서울고법은 공기업 직원이 부하 여직원에게 공개장소에서 "그만먹어라, 살찐다"라고 반복한 게 "신체에 대한 조롱이나 비하로 느낄 수 있다"는 이유로 성희롱으로 판단한 바 있다.
다만 상사가 해당 발언을 공개 장소에서 반복한 점, "(내 예전 애인이) 그 호텔에 잘 있나 모르겠다"는 등 성적 암시 발언을 함께 했다는 점에서 앞서 사안과 발언 배경이나 상황이 다소 다르다.
한편 직장내성희롱은 남녀고용지원법에서 규율한다. 여기서 성희롱은 성적 언동으로 성적 굴욕감과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성적인(sexual)’ 의미가 내포된 언동을 수반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만약 단순히 여성비하 행동, 고정 관념적 성역할 강요 등 이른바 ‘젠더(gender)’ 괴롭힘은 성희롱으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경우에 따라 직장내괴롭힘에 해당할 수는 있다.
김상민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단순히 불쾌한 언사를 두고 괴롭힘, 성희롱으로 문제삼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단순 징계사유가 되는 것과 '괴롭힘', '성희롱'이 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으니 기업들은 사건 발생 시 괴롭힘, 성희롱 요건을 갖췄는지 잘 따져봐야한다"고 말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