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날수록 작품은 점점 작아졌다…결국 수개월 후에 인물상은 못 크기로 줄어들어 몇 배나 더 큰 받침대 위에 고립돼 불안정하게 서 있게 됐다.”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의 평전 <자코메티: 영혼의 손길>에서 저자 제임스 로드는 이렇게 썼다. 1947년 무렵부터 자코메티는 ‘작은 조각’을 고집했다. 사물의 본질을 보고, 그 핵심만 담으려다 보니 조각이 작아진 것이다. 가느다란 못 크기에 불과한 그의 작품들은 역설적으로 작가를 ‘거장(巨匠)’ 반열에 올려놨다.
때론 작은 작품일수록 거대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법.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중견 화랑 ‘Various Small Fire’(VSF)에 한국 작가들이 모여든 이유다. ‘언박싱 프로젝트 3.2: 마케트’란 이름으로 열린 이번 전시에서 김윤신, 권오상, 신미경 등 조각가 28명이 각각 30㎝ 내외의 ‘작은 조각’을 선보였다.
언박싱 프로젝트는 상자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작품들을 선별해 보여주는 전시 기획이다. 변현주 큐레이터와 채민진 아트어드바이저가 기획했다. 참여 작가들에게 제한된 틀에 맞춰 각 프로젝트의 주제에 맞는 작품을 제작할 것을 의뢰하고, 이를 ‘언박싱’(개봉)해 전시하는 방식이다.
전시된 작품들의 공통분모는 선반 위에 얹을 정도로 작다는 점이다. 전시 제목의 ‘마케트(maquette)’는 대형 조각을 만들기 전 미리 작은 크기로 제작해 형태를 가늠하는 습작을 뜻한다. 변현주 큐레이터는 “압도적 크기의 작품이나 스펙터클이 주는 ‘감탄’보다 작은 작품이 주는 감동이 더 오래 남았던 경험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참여 작가들의 존재감은 작지 않다. 40여 년간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등지에서 활동해온 한국 1세대 조각가 김윤신이 그중 한 명이다. 남미의 원목을 전기톱으로 재단하는 그의 조각은 50㎝~1m 높이의 작품이 일반적이다. 작가가 1970년대부터 선보인 ‘합이합일 분이분일’ 시리즈의 미니어처 작품을 감상할 흔치 않은 기회란 얘기다.
이 밖에도 현대미술계를 대표하는 조각가들이 각자의 대표작을 미니어처로 재현했다. ‘사진 조각’으로 잘 알려진 권오상 작가는 그의 ‘데오드란트 타입’ 연작에서 나온 신작 ‘녹색 모자상’을 선보였다. 비누로 빚은 조각으로 시간의 흐름을 형상화한 신미경 작가는 그의 ‘비누 불상’을 한 주먹 크기로 내놨다.
VSF에서 열린 이번 전시는 2022년 시작한 언박싱 프로젝트의 첫 번째 해외 전시다. 전시는 다음달 15일까지. 이후 프로젝트는 내년 3월 독일 베를린으로 무대를 옮긴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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