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회사에선 매년 예약합니다. 전 여덟번째고 같이 온 분은 두 번째 오시는 겁니다. 사실 프로그램 내용은 항상 똑같다고 보시면 돼요." (직장인 A씨)
"서울에 이런 체험관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주변 사람들도 아무도 모르던데요." (20대 이모씨)
건립에만 적게는 100억원, 많게는 약 2000억원에 가까운 세금이 투입된 전국 곳곳의 안전체험관이 '세금 낭비'의 온상이 돼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투입되는 예산은 천문학적인데, 찾는 사람은 드물고 국민 안전 교육을 증진한다는 기능은 사실상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경 혈세 누수 탐지기(혈누탐)팀이 이번에는 전국 안전체험관 사업을 들여다봤습니다.
공개 시설인데…"정보공개청구 하시라"
재정365에 따르면 건립비용만 광나루안전체험관 205억원, 보라매안전체험관 414억원, 울산안전체험관 327억원, 인천국민안전체험관 334억원, 전북119안전체험관 295억원, 제주안전체험관 256억원, 강원 태백 한국청소년안전체험관 1790억원, 화성시민안전교육센터 125억원 등입니다. 8곳에 들어간 건립 비용으로만 총 3746억원의 세금이 들었습니다. 이들 안전체험관들은 재난대처능력 향상과 안전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한다고 각 홈페이지를 통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혈누탐팀이 서울시 동작구 소재 보라매안전체험관을 취재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공문에 건립비, 예산 등의 질문이 담긴 질의서를 담아 보냈으나 일주일이 지나서야 돌아온 답변은 '거부'였습니다. 혈누탐팀은 정보공개청구를 진행해 답변을 받았습니다.
생각보단 괜찮다…"공짜니까"
어렵게 지난달 22일 다녀온 보라매안전체험관. 이곳은 지진·태풍·화재·지하철 등 교통사고 상황을 직접 체험하고 대피 방법 등 안전 수칙을 익힐 수 있는 재난 체험이 주력 프로그램입니다. 이외 응급처치 교육, 어린이 안전체험, 소방관 진로 체험도 가능합니다.10분 남짓의 오리엔테이션 영상을 시청한 이후 교육 담당자 3인에 맞춰 14명씩 3조로 흩어져 체험을 진행했습니다.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지진 체험. 주방처럼 꾸며진 방에 들어가 지진 강도 7.0 수준으로 땅이 흔들리면 가스 밸브 등을 모두 잠근 뒤 책상 밑에 대피하는 연습입니다. 지진이 발생하면, 방문을 열어 둬야 합니다. 문이 틀어져 탈출로가 막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암흑 속에서 벽을 짚고 구조 신호 겸 일행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소리를 내며 탈출하는 법, 지하 노래방 세트장에서 화재로 연기 발생 시 대피하는 법, 화재 시 선로나 승강장에서 지하철 열차가 멈췄을 때 대피법, 수직구조대와 승강식 피난기 사용법, 소화기 사용법, 완강기 사용법 등을 배웠습니다.
이날 참가자들 사이에서 가장 만족도가 높았던 체험은 완강기 체험이었습니다. 참가자 전원이 직접 완강기를 다뤄보고 이를 이용해 3m 남짓 아래로 대피해볼 수 있습니다. 개인 장비를 직접 갖춘 상태로 해보는 유일한 체험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8월 경기 부천에서 발생한 호텔 화재로 인해 완강기 사용법에 관심이 간 것을 계기로 방문했다는 시민도 있었습니다.
"몰랐던 안전 수칙을 많이 알게 됐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공짜기 때문에 괜찮았지 체험형 프로그램이 부족하다"는 후기를 전해온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시민들도 함께 체험한 혈누탐팀 생각도 재난대처능력이 향상됐다는 인상은 없었습니다.
예산은 느는데 이용자 수는 뚝·적자는 쑥
혈누탐팀 확인 결과 광나루·보라매 두 안전체험관에 투입되는 예산은 2021년 8억원→2022년 10억원→2023년 14억원→올해 18억으로 증가세입니다.그런데 이용자 수는 감소세입니다. 특히 서울에 위치한 광나루안전체험관은 전년 대비 작년에 4배 수준으로 떨어졌고, 보라매안전체험관은 반토막 났습니다. 서울시민안전체험관 관계자는 "예산 축소 배정에 따른 운영 인력 감축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 수가 줄어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서울 안전체험관뿐 아니라 대체로 이용자는 다 감소세입니다.
적자 폭을 보면 한숨만 나옵니다. 적자를 안 내는 곳이 없습니다. 광나루안전체험관은 최근 통계는 공개하지도 않고 있고, 보라매안전체험관은 연간 20억원이 넘는 적자를 내고 있습니다. 울산안전체험관 적자도 지난해 47억원에 달했습니다.
각 지자체 안전체험관은 적게는 4년, 많게는 20년 넘게 운영돼왔지만, 통계 누락이 많아 누적 적자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습니다.
프로그램 개선해야 설립 취지 회복
물론 취지가 취지인 만큼, 적자가 나도 괜찮은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목적에 부합하게 시민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말이죠.
어떻게 하면 우리 안전체험관들이 세금 낭비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고민해봤습니다. 먼저 일선 공무원의 폐쇄성 타파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 많은 공무원분들의 협조도 받았지만, 국민 세금이 쓰이는 일에 감시와 견제를 받는 데 인색한 일부 공무원분들은 세금을 납부하는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매년 바뀌지 않는 프로그램도 숙제입니다. 시민들은 체험형 프로그램을 더 늘려 재난 대처법을 높일 수 있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해왔습니다. 시설 관계자는 프로그램 개편 시기가 따로 없고, 해마다 벌어지는 사고에 따라 오리엔테이션 영상을 다르게 편집하는 정도라고 전해왔습니다.
각 지자체에서 기업 종사자들에게 안전 교육 등을 할 때 이러한 시설을 이용하게끔 하는 방안의 필요성도 제기됐습니다. 이곳에서 만난 한 30대 시민 오모씨는 "재난체험 수료증을 직장에 제출하면 온라인 재난안전교육을 면제해주면 어떨까"라고 제안하면서 "매년 몇시간씩 형식적으로 틀어놓고 '요약본' 찾아 문제 푸는 교육보다 100배는 더 유익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혈누탐팀이 방문했을 때는 성인들로 구성돼있었지만, 이 시설은 대체로 '아이와 함께 가볼 만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 포털 사이트를 검색하다 보면 온통 아이들 사진밖에 없습니다. 마치 '키즈 카페'를 연상시킬 정도입니다.
실제 프로그램 자체도 성인을 대상으로 했다기보다는 아이들까지 할 수 있는 범용적 성격이 강합니다. 주로 평일에는 학교에서 방문객들이 오고, 주말에는 아이들 견학·나들이용으로 쓰이는 탓입니다. 30대 시민 송모씨는 "이런 시설이 어린이 현장 체험용으로만 활용되는 것이 아쉽다"며 "정작 야외에서 재난이 발생했을 때 주변 시민들을 통솔할 수 있는 건 성인이지 않으냐. 성인을 타겟팅한 다양한 체험이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짚었습니다.
한국도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말도 나오고, 해마다 20만건이 넘는 각종 사고가 발생합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사회가 발전하면서 재난도 세분화하고 다양해진다. 매년 같은 방식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시민들의 관심도가 떨어지는 건 당연지사"라며 "시민들의 관심사를 분석하지 않는다면 이 기관이 주목받기 힘들 것"이라고 제언했습니다. 이 모든 걸 갖춘 다음 홍보가 이뤄진다면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을 겁니다.
김영리/신현보 한경닷컴 기자